흔들리는 것이 바람 탓만은 아니다 / 박건삼 입춘과 우수, 경칩이 있는 2월은 설레임의 달이다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은 2월은 그래서 상큼하다 아직은 설한풍에 비수를 감추고 훈풍의 미소를 띄우지만 난 알고 있지 열여섯 가시내의 젖몽울 같은 수줍음과 부풀음에 떨고 있는 2월은 가슴 설레는 달이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순이에게 바치고픈 삼돌이에겐 너무 짧은 달이지만 3월, 그 첫 휴가를 기다리는 김일병의 깨알 같은 수첩 속의 2월은 얼마나 그리운 달인가 보조개가 귀여운 초롱초롱한 소녀 같은 때론 비비드한 말괄량이 선머슴애 같은 애증이 엇갈리는 2월은 변덕스러워 좋다 오랜만에 노사가 손잡고 지하철 파업을 중단하고 시어미와 새댁이 군에 간 아들과 지아비를 손꼽아 기다리며 화해하는 그런 달 2월은 가슴 조이는 모..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 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오만원 / 박영희 시 세 편을 보냈더니 오만원을 보내왔다/ 어중간한 돈이다/ 죽는 소리해서 응해줬더니/ 독촉 전화 잦은 에 26,000원 보내주고/ 그 길로 시장통에 가 아내의 머리핀을 고른다/ 이것도 버릇인..
길 / 도종환 우리 가는 길에 화려한 꽃은 없었다 자운영 달개비 쑥부쟁이 그런 것들이 허리를 기대고 피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빛나는 광택도 내세울 만한 열매도 많지 않았지만 허황한 꿈에 젖지 않고 팍팍한 돌길을 천천히 걸어 네게 이르렀다 살면서 한 번도 크고 억센 발톱과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귀뚜라미 소리 솔바람 소리 돌들과 부대끼며 왁자하게 떠드는 여울물 소리 그런 소리와 함께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음성도 세상을 호령할 명령문 한 줄도 가져보지 못했지만 가식 없는 목소리로 말을 걸며 네게 이르렀다 낮은 곳에는 낮은 곳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있다 네 옆에 편안히 앉을 수 있는 빈자리가 있다 * 도종환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 中에서...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즈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숨을 자리가 돼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숙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 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감기..
1987년 여름... 두 달동안 오백병의 소주를 마시고, 삼백편의 시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詩人 박정만 출판사 고려원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박정만 등 7명이 보안사로 끌려갔고, 며칠간 무자비한 취조와 구타,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났다. 박정만은 고문 후유증과 인간에 대한 절망감을 폭음으로 달래다가 1988년 10월 사망했다. 시인 박정만은 죽기 서너 달 전부터 곡기를 끊고 하루도 쉬지 않고 소주를 마셨다. 술의 명정 상태에서 깨고 나면 몸도 마음도 괴로우니까, 다시 취하기 위해 몸속에 소주를 들이부었다. 그는 명정 상태에서 수백 편의 시를 쏟아냈다. 그가 스무 해 동안 썼던 시보다 죽기 직전의 두세 달 동안 썼던 시의 양이 더 많았다. 박정만은 취기에서 취기로 이어지는 황홀경 속에서 시의 영감을 구하고, ..
윤동주 시인 출생~사망 1917.12.30~1945.2.16 학력 연희전문학교 문과 수상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경력 1948 미발표 유작을 첨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 1939 소년에 동요 '산울림' 발표 1939 조선일보에 산문 '달을 쏘다' 발표 자화상 (1948.)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단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이상국 시인 1946년 강원도 양양 출생. 1976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등이 있으며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수상등을 수상했다. 시인의 시는 선적인 깨달음의 세계와 인간적인 따뜻함이 동시에 배어난다. 아버지가 보고 싶다 / 이상국 자다 깨면/ 어떤 날은 방구석에서/ 소 같은 어둠이 내려다보기도 하는데/ 나는 잠든 아이들 얼굴에 볼을 비벼보다가/ 공연히 슬퍼지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보고 싶다// 들에서 돌아오는 당신의/ 모자나 옷을 받아들면/ 거기서 나던 땀내음 같은 것/ 그게 아버지 생의 냄새였다면/ 지금 내게선 무슨 냄새가 나는지// 나는 농토가 없다/ 고작 생각을 내다 팔거나/ 소작의 품을 팔고 돌아오는 저녁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나는 아버지의 농사를 생각한다/ ..
어느 시인의 죽음 마종하 시인이 세상을 뜬지 어느새 1주기가 되었다. 어디에도 마종하 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어느 시인의 죽음이 우리 사회에 던져 주는 질문이 여기에 있다. 시인은 세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유언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게, 자연으로나 빨리 보내주게"라고 해서 장례식도 가족장으로만 치뤘다는 후문이다. 필자에게 '마종하 시인'보다 '마종하 선생님'이라는 것이 익숙하다. 마종하 시인은 필자의 중학교 때 선생님이기도 하다. 마포중학교 때 어느 나른한 오후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시를 한 줄 읽어주시면서 우리들에게 말했었다. '돌맹이'라는 소재를 주면서 다음 시간까지 시를 써오라는 숙제였다. 많은 학생들은 웅성거렸지만 그렇게 한 주가 지나버렸다. 숙제를 내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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