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의 이팝나무 아래, 평 벤치에 걸터앉아 장기를 두는 두 사람 주위로 나이가 지긋한 구경꾼들이 둘러 서 있다. 판에 몰입해 있는 이들의 다양한 표정과 옷차림, 태도 등으로 판단컨대, 비록 한 자리에 모였으나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 같다. 공원을 두어 바퀴 돌다가 호기심이 동하여 나도 그 무리 속에 끼어본다. 중반전에 접어든 반상에는 한漢과 초楚 간에 한창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면밀히 살펴보니 아무래도 초가 약간 유리한 듯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몇 수 진행되지 않아 전세가 금세 역전된다. 수세에 몰린 한이 바깥에 있는 포를 궁으로 불러들이며 공격과 수비를 겸한 수를 놓자 상황이 일변한다. 지켜보는 사람들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일견 평범해 보이나 음미할수록 의미심장한 수이다. ..
12월의 달력을 보면 문득 경배하고 싶어진다. 촛불을 켜놓고 고요의 한 가운데 앉아 기도하고 싶다. 오, 일 년의 마지막 이 순간까지 무탈하게 지내온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12월의 달력을 보면 4백M 계주 경기 모습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운동회의 마지막은 400M 계주로 장식되곤 했다. 운동장에선 환호와 박소소리가 터져 나오고 신바람은 절정에 달했다. 승패를 좌우하는 마지막 게임이며 바턴 터치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여, 마지막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응원자들도 선수들과 함께 마음으로 마지막 골인선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가는 400M 계주-. 12월은 4계절을 달려 골인선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2월은 연말이고 연시를 앞두고 있어서일까, 일 년을 성찰하고 정신을 차리기도 ..
11월은 가을의 영혼이 보이는 달,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보이고 텅 빈 내부가 보인다. 가을이 절정에 도달하여 감동과 찬탄을 자아내지만, 그 뒷면에 감춰진 고독과 고통의 표정이 보인다. 단풍은 생명의 아름다움과 일생의 절정을 보여주지만 지는 노을처럼 황홀하여서 눈물겹다. 11월은 빛깔의 경연이랄까, 삶으로 나타낼 수 있는 모든 표현양식과 기법이 유감 없이 드러난다. 가을이 보여주는 생명의 극치감, 풍요, 결실은 앞모습일 뿐이다. 가을은 삶의 빛깔을 완성하지만. 그 빛깔들을 아낌없이 떨쳐버린다. 모든 빛깔들을 불러모아서 해체해 버린다. 천지에 넝마처럼 낙엽이 날려 뒹굴고 색은 무너져 내린다. 절정이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던 것만큼 무너짐은 쓸쓸하고 처절하다. 결실로서 풍요를 얻은 것만큼 버림으로서 마음을 비워내..
우리나라 오월에게 ‘계절의 여왕’이란 왕관을 씌운다면, 시월에겐 ‘계절의 황제’라는 대관식을 거행해야 마땅하다. 예전부터 시월을 ‘상달’이라 불러 다른 달과는 달리 사뭇 격을 달리해 왔다. 시월이 오면 다른 달과는 느낌부터 달라진다. 일 년 중에 하늘이 가장 맑게 열려, 영원의 얼굴이 비춰 보일 듯하다. 만물의 시선이 문득 하늘로 향하게 만들고, 우주와 교감의 시간을 갖게 만든다. 시월이면 까닭모를 고독과 그리움이 밀려드는 것은 하늘의 무한한 깊이만이 아니다. 바람의 촉감과 풀벌레들의 언어와 초목들이 보여주는 색채미학 때문만이 아니다. 시월은 풍요 속에 비움이 있고, 채움 속에 해체가 있으며, 만남 속에 별리의 순간이 있다. 시월은 마음의 거울을 꺼내 들고 한 번씩 자신의 영혼을 비춰보고 싶은 달이다. ..
구월은 뜨거운 땡볕이 물러가고 하늘이 창을 열고 얼굴을 내 보이는 계절……. 하늘은 맑은 표정을 보이고 비로소 마음을 연다. 어느새 선선해진 바람도 들국화나 코스모스 꽃향기를 실어 오고, 열린 하늘을 향해 피리를 불면 가장 멀리까지 퍼져나갈 듯싶다. 구월은 그리움의 심연에 조약돌이 풍덩 날아들어 잔잔히 물이랑을 이루며 마음 언저리에 밀려오는 듯하다. 맑은 하늘을 보고, 햇볕을 편안하게 맞아들이며 가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계절이다. 구월은 야단스럽지 않다. 맑음과 그리움을 안고 다가온다. 초록으로 덮인 산과 들판이 조금씩 가을 색감으로 채색돼 간다. 하늘이 열려서 무한 공간과 만날 수 있는 달이다. 가슴을 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볼 수 있어야 마음이 넓어진다. 영혼은 점점 깊어지고 사색에 잠겨보기..
문우 몇이서 지리산의 노고단을 가기로 한 날로부터, 나는 마음이 설레었다. 우리의 일정은 노고단에서 해돋이를 본 다음, 화엄사를 들러 뱀사골이나 피아골을 오르는 것이지만, 나만은 마음속으로 또 하나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네 시에 구례역에 내리자 안개가 마치 마중을 나와 있었던 것처럼 와락 내게로 달려들었다. 안개와 농촌의 들녘에서 풍겨오는 퇴비냄새를 가르며 노고단에 오르니 아침 여섯 시, 우리는 산 너머 또 산이 주름처럼 겹쳐 보이는 정상에서 역사의 한(恨)이 골마다 서려 있는 지리산을 유정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출의 장관은 놓치고 말았다. 일행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서둘러 하산을 했다. 다음 일정은 화엄사를 들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먼저 매천사(梅泉祠)로 가자고 ..
번 역 문 군사를 일으킬 때 특별히 호칭을 만들어 스스로 기이함을 드러내는 이들은 결국 대부분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 송의(宋義)는 경자관군(卿子冠軍)이라 칭했는데 패배하였고, 적의(翟義)는 주천대장군(柱天大將軍)이라 칭했는데 패배하였고, 유연(劉演)은 주천도부(柱天都部)라 칭했는데 패배하였으며, 전융(田戎)은 소지대장군(掃地大將軍)이라 칭했는데 패배하였다. 이는 대개 국량은 작은데 스스로를 자랑하려는 마음이 있어 쉽게 자만하여 패배한 것이다. 이주영(爾朱榮)이 천주대장군(天柱大將軍)이라 칭한 일, 후경(侯景)이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이라 칭한 일, 황소(黃巢)가 충천대장군(衝天大將軍)이라 칭한 일 등, 자질구레한 사례가 무척 많지만 또한 말할 거리도 못된다. 원 문 起事之始, 別立號稱, 以自表異者, 卒..
해거름 하산 길은 늘 아쉬웠다. 여인들이 풍덩한 치마폭을 추스리듯 물결치던 산줄기가 그 끝자락을 끌어당기는 곳에는 으레 난장판이 벌어졌다. 넓다란 바위가 폭파당한 뒤 그 까만 살덩이가 산산이 부서지고, 등뼈가 까무러뜨린 채 뻘건 늑골이 흉물스럽다. 거기다 어느새 삐죽삐죽 꽂힌 앙상한 철근 사이로 벌떡 누워버린 나무들이 뿌연 뿌리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 호젓한 산 모퉁이에 서면 숨은 듯 초가집 지붕 옆으로 몽기몽기 작은 굴뚝에서 연기를 만날 차례인데, 그리고 희미한 불빛 사이로 도란도란 말소리에 딸그락 딸그락 숟갈 소리가 들릴 때인데 말이다. 이렇게 두리번 두리번 한참 내려오다가 서쪽으로 남아 있는 서러운 노을빛에 걸음을 멈추었다. 건너편 개울가 높다란 감나무에 살짝 까치집이 걸려 있었다. 옛날 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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