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는 권력 휘두르는 것으로 무기를 삼고, 여자는 성질부리는 것으로 무기를 삼는다.”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어느 큰스님의 법문 가운데 한 구절이다. 한편으로는 다소 무리한 표현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경구警句인 것 같아 고개가 주억거려지기도 한다. 군주가 인자하지 않아서 백성을 힘으로 다스리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듯, 여자가 지혜롭지 못하여 가족에게 성질을 부려대면 집안에 평지풍파가 일어나지 아니하던가. 심한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에는 새들도 불안에 떠는 것처럼, 가정의 조종간을 잡고 있는 주부가 분별없이 성을 잘 내는 집은 가족이 가슴을 졸이게 되는 건 정한 이치일지다. 우리말의 ‘성내다’라는 단어를 영어에서 찾으면 ‘Anger’와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매의 눈으로 교습생을 둘러보았다. 범인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풀 죽은 얼굴로 손을 들었다. 내가 바로 박자를 놓치는 바람에 잘 나가던 기타합주를 망친 범인이었던 것이다. 등 뒤로 사람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밀당' 즉 밀고 당기는 데에 서툴렀다. 특히 타이밍에 맞춰 밀고 당기고 멈추는 연구기법은 보통의 촉으로는 되지 않았다. 마음은 조급하고 손은 무능했다. 게다가 기본기도 부실했다. 진도에 급급하여 그 단계를 건성 훑고 지나친 것이다. 본격 연주에 들어가자 금세 바닥을 보였다. 걸핏하면 박자에서 이탈했고 허겁지겁 쫓아가느라 바빴다. 선생의 말대로 나는 결국 로망스까지 배우다 포기하는 보통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애당초 예상된 불화였다. 연하고 말랑한 ..
장터 초입에는 늙수그레한 남자가 쭈그리고 앉아 숫돌에 불꽃을 튕기며 무딘 칼끝을 연마하고 있다. 귀청을 때리는 마찰음이 봄 햇살에 부서져 꽃잎처럼 흩어진다. 어린 모종들이 눈을 비비는 식물원 앞에 세모의 날을 세우고 등이 굽어 있는 호미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호미 한 자루를 손에 들고 어머니처럼 그 무게를 가늠해본다. 몸집은 가볍고 생김새는 단순하다. 탁월한 발군의 솜씨에 비해 어떤 치장도 없다. 담금질한 호미 끝이 반짝거리며 마치 주인을 찾고 있는 듯하다. 나는 손끝이 아려오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호미를 보면 녹슬지 않던 어머니의 힘이 느껴진다. 명주실같이 팽팽하게 전해지는 전율은 아픔이 되어 명치끝을 누른다. 가게 앞에 서서 고추 모종을 팔고 있는 주인에게 가격을 묻자 “육천 원이요.” 한다. 봄이 ..
궤나는 악기지만 흔한 악기는 아니다. 궤나가 연주되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궤나라는 낱말은 우리말 큰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궤나가 악기라면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목관, 금관, 건반, 현이나 타악기에도 속해 있지 않으니 천사들이 부는 나팔 같은 것일까. 옛날 잉카인들은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그 사람의 정강이뼈로 궤나라는 악기를 만들어 떠난 이가 그리울 때마다 그걸 꺼내 구성지게 불었다고 한다. 성악가들이 부르는 아리아는 아랫배에서 가슴을 거쳐 입으로 연주하는 육관(肉管)악기의 음악이라면 궤나 소리는 사람 뼈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새어 나오는 단음절로 연주되는 골관(骨管)악기의 음악이다. 궤나로 연주되는 소리를 한 번쯤 들어보고 싶다. 그리움이 끝없이 이어지면 비탄의 심연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의 전주곡 15번 ‘빗방울’을 듣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서 비가 오라’고 그 음악을 듣는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참 좋다. 비가 오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비가 전해 주는 슬픔이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좋다. 쇼팽의 ‘빗방울’을 듣고 있으면 슬픈 일도 없는데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소리가 괜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럴 때면 빗물이 타고 내리는 유리창 앞에 선다. 눈도 흐려지고 마음도 흐려져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별의 아픔을 앓는 사람처럼 외롭고 처량하다. 슬플 때는 유리창처럼 울어야 한다. ‘빗방울’을 들을 때마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쇼팽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이다. 스물 여덟의 쇼팽은 인후결핵을 치료하기 ..
새를 만나는 날은 글을 쓰는 것만큼 행복하다. 글을 쓰는 것만큼 새를 만나는 일도 행복하다.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침묵으로 새를 만난다. 새와 나란히 걸으며 해송 사이로 밀려 오는 갯바람과 사각대는 억새와 입선(立禪)에 든 겨울나무의 잔가지가 떠는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이러한 새의 몸짓이 내 상념을 흔들어 깨운다. 동살이 잡힐 무렵 공기의 부력으로 삼라만상을 회전시키는 새들을 볼 때면 새로운 세상으로 여행을 꿈꾸기도 한다. 때로는 새의 비상 뒤에 남겨진 긴 여운에 기운이 빠지기도 하지만 비상 같은 글쓰기는 내가 새가 되는 시간이다. 가진 것 없으면서 가벼우나 단단한 날개로 하늘을 가르는 힘찬 몸짓에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성스러움이 담겨 있다. 글도 그러리라 믿는다. 어릴 적에 사방이 논밭..
번 역 문 의주 변경 멀고 아득하니/ 나라의 서쪽 국경이라 백성들 채무로 곤궁하여/ 물에 빠진 듯 불에 타는 듯하였도다 공이 그 장부 불태워/ 재물 버리고 사람 구하니 우리 백성 재앙의 구덩이에서 건져내고/ 우리 백성 이익의 근원 넓혀주었도다 옛날에는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전원에서 편하게 지내니 들에는 뽕과 삼이 있고/ 울짱에는 닭과 돼지 있도다 이에 배불리 먹고 노래하며/ 자식을 먹이고 손자와 장난치니 어찌 공의 덕이라 하랴/ 어지신 성군 덕이로다 灣塞遙遙 만새요요/ 國之西門 국지서문 民困于貨 민곤우화/ 如墊如焚 여점여분 公火其籍 공화기적/ 以財易人 이재역인 脫我禍穽 탈아화정/ 弘我利源 홍아리원 昔阽溝壑 석점구학/ 今安田園 금안전원 野有桑麻 야유상마/ 柵有鷄豚 책유계돈 載飽載歌 재포재가/..
땅 위에 사는 짐승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길짐승과 날짐승이다. 길짐승은 네 다리와 꼬리를, 날짐승은 두 다리와 날개를 가졌다. 꼬리 있는 짐승에게는 날개가 없고, 날개 있는 짐승에게는 꼬리가 없다. 아니다. 날개 달린 새들에게도 꼬리는 있다. 있기는 하지만 새들의 꼬리는 꼬리가 아니다. 꽁지이다. 외양이 변변치 못하거나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꼬리는 ‘꽁지’나 ‘꼬랑지’로 전락하고 만다. 공작이나 수탉처럼 꽁지깃이 화려한 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꼬리치레 하느라 높이 날기를 포기한 ‘폼생폼사’족들이 새들의 세상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날짐승의 날개가 비상(飛翔)을 위한 거라면, 길짐승의 꼬리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 몸체를 떠받치는 네 다리만으로도 달리고 서는 데 부족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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