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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오셨구려. 문학제를 한다기에 와 보았소. 내가 누구냐구요?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마누라 양창희(梁昌姬)요. 내 가만 보니 부천에서 수주문학상도 만들고, 수주 책들을 다시 내기도 합디다. 그런데 모두 다 '수주 수주'지 함께 살면서 고생한 내 이야기는 아무도 안하는 거여. '수주'하면 말술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술꾼 아니요? 그 술꾼 마누라로 살았던 내 이야기 좀 하려고 이리 왔소. 수주가 "이년아! 썩 내려와라!" 하면서 저쪽에서 달려올 것 같기도 하네요. 만취해 들어오면서 "이년아!" 하고 부르는 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였으니까. 그 소리만 나면 밥상에 앉아있다가도 이웃집으로 도망을 쳤지. 그러면 "거기 대가리 허옇게 희고 코 빨간 년 있거든 당장 내쫓아라. 세상에 둘도 없는 악독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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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역 문 음식ㆍ의복ㆍ수레ㆍ거처는 하(下)로 하고, 덕행ㆍ언어ㆍ문학ㆍ정치는 상(上)으로 하라. 飮食衣服輿馬居處 下比 德行言語文學政事 上比 음식의복여마거처 하비 덕행언어문학정사 상비 - 성대중(成大中, 1732~1812), 『청성잡기(靑城雜記)』2권 「질언(質言)」 해 설 조선 후기의 학자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이 엮은 『청성잡기』에는 우리가 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말이 많이 실려 있다. 특히 「질언(質言)」에 실린 1~3행의 짧은 격언들은 건강하고 견고한 삶에 대한 매우 실용적인 지침이 되어준다. 무수한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고 갈팡질팡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선명한 기준을 제시해 준다. 우리고전에서 찾은 이러한 삶의 철학과 지침은 오늘날의 ‘미니멀리즘(Minimalism)’과 일..
커피 향으로 우려낸 초저녁 입담이 옅어질 즈음 허기는 짙어졌다. 갑작스런 비는 어느새 눈으로 내리고 있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코트와 점퍼의 후드로 대충 몸을 감쌌다. 적당히 기분 좋은 눈을 맞으며 도심의 불빛을 훑었다. 부끄럼 많은 골목이 수줍게 내미는 ‘수제 칼국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따뜻한 바닥이 군불을 지핀 듯 정겹다. 앉은뱅이 식탁에 앉으며 서둘러 칼국수를 주문했다. 시장기부터 삭이라는 듯 먼저 식탁에 놓인 건 보리밥. 작은 공기의 보리밥에 열무김치와 고추장이 곁들여진 사이드메뉴다. 칼국수가 나오기 전의 맛보기는 입맛을 돋우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예전 어느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키면 약간의 쌀밥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짜장면을 먹고 남은 양념에 비벼 먹으라는 후덕함에..
앞으로 나아가다가 길이 막히거나 삶이 멈춰있다고 생각될 때면, 아들은 자진하여 더 힘든 자리를 찾아 떠나곤 했다. 안일함 속에 길들여지면 방향감각을 잃고, 삶이 무력해진다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과학 고등학교였다. 집을 떠나 기숙사생활을 해야만 하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대학을 진학하고 난 뒤엔 함께 살 수 있어 좋았지만, 실험실에서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런 아들 때문에 학교 가까운 봉천동으로 이사 왔는데, 아들은 또 다시 훌쩍 유성으로 내려가 기숙사와 연구실만 왔다 갔다 하면서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연구를 해보겠다며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서울에서 의학공부를 하느라고 신랑을 따라가지 못한 며느리는 방학하는 다음 날로 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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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어른들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상상력을 펼쳐서 자기들이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전설 같은 증조부라거나 할머니라는 분이 어떤 분인가 알고 싶어한다. 요전 날 저녁 내 어린것들이 내 곁으로 기어 와서 그들의 증조모가 되는 필드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려 했던 것도 이런 마음에서였을 거다. 필드 할머니는 노퍽에 있는 큰 – 그들과 아빠가 살고있는 집보다 백 배나 더 큰 – 저택에 사셨다. 그 집은 그들의 ‘숲속의 아이들’이란 민요를 통해서 최근에 알게 된 비극적인 사건의 현장 – 적어도 그 고장에서는 대체로 그렇게들 믿고 있다 – 이기도 하다. 사실 그 어린아이들과 그들의 잔인한 삼촌에 대한 이야기 전부가 처음부터 방울새가 나오는 대목까지 그 커다란 홀의 벽난로 장신 나무판에..
덕유산에서 두 해 겨울을 보낸 적이 있었다. 덕유산의 눈은 한 번 내리기만 하면, 숲처럼 내렸다. 산봉우리와 산봉우리가 어깨를 짜고 길게 뻗은 산맥 위에 호호탕탕히 쏟아졌다. 원시림처럼 무성히 내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손을 모우고 모두 고개를 숙였다. 아무도 항거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독야청청 하는 나무가 있을 리 없었다. 산들도 고즈넉이 눈을 감았다. 함박눈은 실로 무서운 정복자였다. 산이고 들이고 마을이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남김없이 차지해 버렸다. 요란한 승리의 군화소리도, 펄럭이는 깃발도 없이, 모든 것을 정복해 버렸다. 아무도 함부로 손댈 수 없이 신성해 보이던 덕유산 봉우리도, 변함없이 졸졸거리던 개울도, 울울창창한 침엽수림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정복자들은 칼을..
‘풍경’은 바람과 경치가 합해진 말이다. 두 개 이상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 경치는 정적인 것이며, 바람이 있어야한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겨울 해 질 녘 느티나무가 노을을 배경으로 빛을 뿜는 듯 보이는 건 제 혼자만으로서가 아니다. 한 잎도 남김없이 떨쳐버린 가지들이 수백 갈래 하늘로 뻗친 모습은 섬세하고도 날렵하다. 노을빛과 어둠에 묻힐 산 능선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경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풍이 든 숲길이 황홀한 것은 오래지 않아 화려한 색채들이 사라지기 때문일 게다. 낙엽을 밟으며 그 길을 벗어나기가 아쉬워 뒤돌아보기도 한다. 그 길이 더 정다울 때란 노부부나 연인들이 걷는 모습을 보는 순간이다. 미음이 끌리는 곳에서 사랑의 고백은 이뤄지고 별리도 나누게 된다. 함박눈 내리는 공원 벤치에서,..
나는 소년기 때부터 마음에 드는 하나의 방을 갖고 싶었다. 알맞고 소담스런 방을 갖겠다는 것이 하나의 작은 꿈이었다. 아침 방문을 엶으로써 하루가 시작되고 저녁 방문을 닫고 인간은 하루를 거두고 내일을 예비한다. 방은 인간이 마음 놓고 안식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곳이며 인간이 태어나고 임종하는 곳이요, 인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러한 까닭에 인간은 누구나 제각기 방을 잘 치장하려 들며, 나 또한 상상의 세계에서 내 방을 즐겨 치장해 보는 버릇이 있다. 나의 방은 아파트나 양옥집의 방이 아니다. 나의 방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조그마하기는 하나, 오붓한 기와집의 방이며 숲길로 통하는 오솔길 가에 있다. 창문을 열면 숲길의 아청빛 녹음은 늘 창취한 모습으로 싱그럽고 또한 개결하다. 우거지는 녹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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