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항구 풍경은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항구에서 멀어져 가는 여객선을 향해 흔드는 애달픈 눈물의 손수건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에 화답하는 구슬픈 뱃고동 소리도 사라져버렸다. 이별을 흔드는 눈물의 손수건 대신 휴대폰이 그 역할을 대신 하게 되어 떠나도 옆자리에 더 가까이 있게 만들어 주었고, 떠나고 보내는 사람들의 콧등을 저리게 만들던 뱃고동 소리는 소음 공해의 견제로 소리 없이 운송의 책무만 다하고 있을 뿐이다. 고도의 물질문명은 인간의 낭만과 그리움과 향수의 정감을 말끔히 앗아가 버렸다. 여수의 국동 일대의 선착장에는 수백 척의 크고 작은 어선들이 낮이나 밤이나 움직이지 않고 매달려 있다. 잠수기조합 주변으로는 잠수부들의 잠수작업으로 잡아 올린 해삼이며 개불 그리고 전복이며 새꼬막 등을 실어 ..
그리운 시절들은 다 여름에 있다. 여름이 젊음의 계절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성장만 하면 되는 여름은 무모하다.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은 존재의 치열한 향일성(向日性)들은 아픔도 모르고 세포분열에 주력한다. 아, 그리운 시절, 그 여름날들. 산그늘 진 갈매실 냇가의 자갈밭은 그 시절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개성대로 솔직하던 고향친구들이 은밀하게 모여서 주량을 늘여 가고, 끽연 폼의 멋을 창출하고, 여울낚시의 기량을 숙달시키고, 매운탕 끓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음모하고 실행했다. 이발소집 주호는 ‘홍은반점’에 새로 온 색시에게 반했다. 우리는 주호가 밤중에 색시를 겁탈하러 주방의 환기창을 타넘어 가는 것을 음모하고 실행했다. 성장은 무모한 만큼 미숙해서 우리들의 음모는 주호를 아직 국물이 덜 식은 국수가락 ..
창경궁 앞을 지나노라니 어떤 부인이 허겁지겁 다가와서는 의과대학 후문을 묻는다. 옛날 약학대학이 있던 동숭동 쪽으로 나가는 문을 알려 주었으나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아 “여보세요?” 하고 불러보니 이미 신호를 따라 반대편으로 건너간 후였다. 아무리 흰 옷이 유행이라지만 여인의 새하얀 한복 뒤태가 쓸쓸해 보여서 대학병원 영안실 쪽의 후문을 물었을 것 같은데, 불러세우기엔 너무 늦었다. 서른은 되었을까. 다시 확인하려고 돌아보며 물어줄까 하고 서 있어봐도 허겁지겁 달려가고만 있다. 나는 20대 초반을 여기서 멀리 않은 원서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이곳에만 오면 잠시 20대 시절로 되돌아가곤 한다. 내가 다닌 학교는 아니지만 시계탑이 있는 의과대학엘 자주 갔고, 담쟁이덩굴이 덮인 건물을 지나 동숭동 쪽으로..
카카오 톡이 소통의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친구들과의 카톡방, 가족 혹은 동우회 회원들과의 카톡방 등 다양한 카톡방을 통하여 우리는 이웃과 소통한다. 전화나 편지로 소통했던 30년 전의 시절을 생각하면 참으로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대단하다. 하지만 일방적인 소통이다 보니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카톡방에 “북적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립시다.”란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여기서 ‘북적’이란 ‘북한을 찬양하고 적폐라는 미명하에 건전한 우익을 말살하려는 청와대의 용어임’이라고 했다. 난 순간적으로 장난기가 발동했다. 장난기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글의 내용에 대한 거부감이 컸었다. 그래서 나는 “꼴값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립시다.”라고 글을 올리면서 여기서 ‘꼴값’이란 ‘꼴통들이 갑질하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포기한 형들과 누나는 생업전선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돈을 벌었다. 순서에 밀려 마지막에 태어난 나는 '불쌍한 막내'라는 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형들은 내가 상고로 진학해서, 은행에 들어가 빨리 돈을 벌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친한 친구들이 인문계로 진학한다는 이유로 벽창호처럼 고집을 피워 인문계로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집보다는 '경호'나 '민식' 같은 친구 집에서 먹고 자는 일이 더 많았다. 친구 어머니들은 항상 따뜻한 밥, 김, 계란과 갈치구이 같은 맛있는 반찬으로 상을 차려 주었고, 도시락에 용돈까지 얹어 주었기 때문에 굳이 집에서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빠듯한 살림에 입을 하나 덜었다고 생각하는 가족들도 그렇게 개의치 않..
내가 산으로 거처를 옮긴 지도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띠풀로 지붕을 이고, 흙벽으로 방을 꾸며 작은 한 몸 누웠으니 심신이야 그지없이 편안하다. 낮이면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때를 맞추어 찾아오고, 밤이면 달과 별이 늦도록 벗이 되어 세상일은 까마득하고, 세월이 얼마만큼 흘러간 줄 셈을 할 수 없다. 봄 아지랑이가 산등성이를 덮는가 싶더니 어느새 찬 서리 내려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고, 입동을 재촉하는 눈비에 날아가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짧은 해 쉬 지고 긴긴 밤 웅크리고 누워 적막강산 외로운 처지를 돌아보면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내 인생의 역정이구나. 막상 입을 열자 하면 자랑할 일이 전혀 없고, 그렇다고 말자 하면 영영 묻혀질까 염려되어 무딘 글로 두어 자 적어 본다. 선대께서 당쟁에 ..
장터 한복판에 점포도 없는 가정집이 있다는 것은 싱거운 일이다. 왁자지껄한 시장바닥에 양 쪽 귀를 틀어막고 앉아 있는 모양새의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그래서 닷새에 한번씩 장날이 되면 시장판으로부터 온갖 실랑이와 악다구니가,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육두문자 섞인 욕지거리가 방안까지 차고 들어왔다. 우리 집이 '버드나무집'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집 앞 양쪽에 지붕 높이만한 버드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누워 창문을 올려다보면 버드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천막을 붙들어 맨 줄에 스칠려서 군데군데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위쪽으로 갈수록 성한 가지가 없는 나무였다. 때로는 매어놓은 줄이 너무 팽팽해서 나무는 중심을 잃은 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도 했다. 나무는 우리가 그 집으로 이사 오기 오래 전부터 거..
나무가 쓰러졌다. 지난 태풍에 쓰러진 나무는 조립식 건물위에 걸쳐졌다. 넘어지며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와 가지 그리고 푸른 이파리들이 바닥에 흥건하다. 햇빛에 나무는 죽었는지 검게 변하고 있다. 어머니는 시장입구에서 국밥집을 했다. 국밥집에는 과년한 딸이 둘 있었는데 예쁘다는 소문이 돌았다. 때문에 인근 부대에서 군인들이 휴가를 나오면 먼저 들렀다. 어머니가 군인들을 친자식처럼 아껴주고 공짜로 음식을 준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번졌다. 어머니라고 부르는 아들 같은 군인들이 많았다. 은근슬쩍 처자들 보는 재미까지 쏠쏠했다. 군인들은 돼지국밥 한 그릇에 소주 한잔을 마시면서 고향생각에 눈물을 지었다. 그들이 안타까운 어머니는 용돈을 아끼지 않고 주었다. 군인들이 가득했지만 국밥집은 가난했다. 늘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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