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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흑구 문학상 금상 국도를 택한 예상은 완전 빗나갔다. 열여덟 량 장대열차처럼 도로는 정체만발이다. 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만큼 아까울 때가 있을까. 차라리 잠시 쉴 곳을 찾는데 우측으로 트인 길 하나가 눈에 띈다. 순화된 어휘라고 느낌이 다 좋아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길어깨란 갓길로 사용되기 전의 낱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을 더 좋아한다. 어깨란 그 사람의 자존심이 배어 있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당당해 보이려면 어깨를 펴라고들 하지 않는가. 어깨를 내어주는 건 내 힘을 빌려주는 일이고, 어깨에 기대는 것은 상대에게서 안식을 얻는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니 길어깨란 무척 편안하고 정감 가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삶에서도 이런 어깨를 만나면 세상은 따뜻한 고향이 된다. 사람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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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자존심은 일상적인 의미로 말하는 자존심, 예컨대 "내가 이런 지위인데 어디에 가서 이런 대접을 못 받았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그래서 어디서 낮게 평가를 받든 이른바 자존심이 상하지 않거든요. 자존심을 다루는 철학을 자기를 배려하는 미학적 윤리학 곧 존재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미학이라는 것은 원래대로 번역하면 실존미학이라고 해야 됩니다. 철학에서는 '존재'와 '실존'을 구별하는데 존재는 그냥 있는 상태고, 실존은 어떤 것이 자기 규정에 맞게 참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또 생물학적 종으로 있는 것은 존재에 지나지 않고, 인간이 정말 인..
이따금 차를 몰고 도시로 나갈 때가 있다. 시골의 국도나 고속도로를 달릴 때는 그런대로 안심하고 차를 몰 수 있다. 그런데 도시의 입구에 딱 들어설 때부터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도대체 내 차를 어디로 집어넣어야 할지, 어떻게 내 차의 앞머리를 들이밀어야 할지. 나는 내가 가야 할 목적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직 달리는 저 차들 속으로 어떻게든 내 차를 끼워 넣어야 한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일념으로 두 눈을 잔뜩 부릅뜨고 입술을 앙다물곤 한다. 나는 언제나 출발이 늦고 속력이 낮은데 조금만 꾸물대도 뒤에서 요란한 경적 소리가 나고 그 소리는 나를 겁나게 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나같이 어쭙잖은 촌뜨기 기질을 가진 사람하고는 도대체 맞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 (중략) 십이..
칼 갑니다. 칼 갑니다. 누군가에겐 눈물 섞인 소리요, 또 누군가는 화들짝 놀랄 소리다. 오뉴월 서리 내리는 소리에 나도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저만치 낡은 오토바이 한 대가 멀어지고 있다. 마침 속이 출출한 터, 허기를 채우기 위해 포구로 나간다. 횟집 상가에 들어서자 비릿한 냄새가 끼쳐온다. 몸속 유전자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원시의 본능이 발동한다. 꿈틀대는 고기들을 보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문어, 넙치, 우럭, 해삼, 개불…. 싱싱한 먹잇감을 고르려 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다니는데, 바깥쪽에서 강한 마찰음이 들려온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보니 한 노인이 담벼락 음지에서 칼을 갈고 있다. 위잉, 쨔르르르. 칼날을 고속 연마기에 대자 자잘한 불꽃이 흩어진다. 안경 너머로 양면을 가늠하며 날을..
이슥한 밤, 생명이 에너지를 충전하여 키를 한 뼘씩 키우는 시각이다. 어둠은 밝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밤에 다시 펼쳐 놓고 그 사유의 뜰로 손목을 잡아 이끈다. 그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던 왜가리 한 마리. 먹이를 잡기 위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발목을 강물에 서려두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흰색 몸통에 가슴과 옆구리에 난 회색 세로 줄무늬가 신비스러웠다. 물살은 왜가리의 발목을 하염없이 적시며 흘렀다. 강물 밖으로 삐죽 내민 바위나 주변 땅에 날개를 접으면 되련만 왜 강물 속에 발목을 담그고 있는 것일까. 강가에 서식하는 수초식물처럼 발은 강물 속에 두고 몸체는 밖으로 내민 형국이었다. 달포 전, 섬진강변을 지나다 눈에 잡힌 한 풍경이다. 왜가리는 몸통보다는 흐르는 강물 속에 담그고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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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지난겨울 눈길에 넘어져서 고관절 수술을 하셨다. 수술을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하였는데 잘 견디셨다. 담당의사도 놀랄 정도였다. 가족들, 친척들, 동네 분들의 병문안이 이어졌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누구는 몇 번 오고, 무엇을 사오고, 얼마를 주고 갔다고 사람들의 면면을 이야기하느라 바쁘셨다. 꼭 올 줄 알았던 사람이 안 온다고 서운해 하기도 하고, 그 집 어멈 죽었을 때 부조를 얼마 했는데 그 사람은 그것의 반만 주고 갔다고도 하셨다. 엄마는 죽만 드셔야했다.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으니까 소화도 안 되고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배곯아서 죽겄다. 곰국에다 밥 좀 말아 묵으먼 원이 없겄다.” 하셨지만 갈수록 미음을 넘기기도 힘들었다. 오빠는 “이렇게 안 드시면 못 일어나요. 그러면 요양병원 가셔야..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본다. 띠별로 출생년도에 한마디씩 풀어 놓은 말이 재미있다. 신문을 대충 훑어보고 청소며 빨래를 몰아쳐서 한다. 집 떠나있는 아들들이 오는 날이다. 월화수목은 느긋하게 살다가 주말만 되면 살림하는 주부가 된다. 세탁소에 들렀다. 서너 해 보아왔건만 아주머니는 처음본 듯 늘 데면데면이다. 하긴 살갑게 대하는 거 보다 편할 때도 있다. 아주머니가 옷을 내주면서 웬일로 말을 건넨다. “화장 안 해도 얼굴이 깨끗하셔요.” 집 나서려면 군빗질에 립스틱 정도는 바르는데 민낯으로 보였나. 그래도 아주머니의 뜬금없는 말이 싫지는 않다. “사장님은 더 고우셔요.” 말대접을 한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살짝 흔들면서 “아휴, 저는 젊잖아요.”하는 게 아닌가. 그럼 나는 늙었다고? 기껏 해봐야 대여섯 살..
물황태수라는 말이 있다.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부처님 근처에 있는 듯하지만 신통치 않은 사람을 말한다. 남편은 아주 오래된 농담처럼 나에게 한 번씩 물황태수라고 한다. 남편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살림 간섭을 가끔씩 하는데 오늘도 청소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야 했다. 청소기 브러시가 지저분해서 새것으로 사다가 바꾸라고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두 번이다. 오늘은 꽃잎 속의 가시처럼 그 말이 콱 가슴 속으로 와서 박혔다. 우황청심환이라도 먹어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촛불 밝힌 식탁에서 티타임의 모녀처럼 차라도 마시고 있었다든지 저물녘의 황홀 속에 빠졌다든지 꽃을 찾아서 어떤 나들이라도 갔다 온 뒤라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의 성격을 지 알고 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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