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4, 5세 때 일인가 보다. 내가 살던 관북 어느 마을에 외로운 한 노인이 있었다. 그 당시, 60이 넘었다면 굉장한 늙은이 대접을 받을 때다. 이 노인은 그때까지 취처(娶妻)도 하지 않고 장성한 큰집 조카의 행랑방에서 기거를 했다. 그런데 이 노인은 동네에서 이름이 나 있었다. 그 첫째가 장가를 들지 않은 것, 둘째는 글방에 다닌 일도 별로 없는데 유식한 문자를 곧잘 쓴다는 점이었다. 그중에 하나, 아직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기성명이족의(記姓名而足矣)라는 말이 있다. 이 노인은 입버릇처럼 “글을 많이 배워서 무엇하는가, 이름 석 자 쓸 줄 알면 그만이지.” 하는 일종 노인⎯ 노장적인 소박한 생각을 가진 이였다. 그 나이에 남들은 분에 따라 자녀들의 접대 효도를 받아..
거울을 본다. "꽃도 풀도 아니군. 나는 콩나물이다. 축축한 곳에 산다. 머리카락도 자라지 않는 깊은 어둠 속이다. 오늘도 난 수많은 골목이 있는 생각의 마을을 지나 긴 터널을 달려 마음이 보이는 가까운 내륙의 섬을 여행한다. 시간이 기웃거리며 도착하고 싶은 장소가 있다. 사치스러운 꿈이 피어나던 꽃밭을 찾아, 아직 앉지 못하고 샛길을 서성인다. 젖은 보자기 밑에서 햇빛을 향해 바글거리며 숨 쉬던 콩나물이 사는 불 꺼진 동네가 보인다. 어둠 안쪽에서 창백한 얼굴을 내밀고 섰던 깡마른 존재 하나. 다리를 뻗고 눕고 싶던 콩나물 줄기의 욕망일지 모른다. 사람의 손길이 그리운 거기." 얼굴에 검은 보자기를 쓰고 시루 밑바닥에서 총총거리며 뿌리털이 자라고 있는 콩나물의 자화상이다. 여전히 목이 마르다. 안식할 ..
오늘 밤에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을도 깊어 밤이면 창문을 닫고 잠들 만큼 기후도 선선해졌는데, 그 귀뚜라미가 베란다 어느 구석에서 아니면 책장 뒤에 아직도 살고 있다면 가냘픈 울음소리라도 들려줄 것 같은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 지난여름 책을 정리하다 책장 구석에서 튀어나온 한 마리 귀뚜라미를 발견하고 놀랍고 반가워 손안에 잡아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베란다로 뛰어나간 귀뚜라미는 이내 화분들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만 그날 이후 고향에 돌아간 사람처럼 공연히 마음이 부풀고, 올 가을에는 견고한 아파트 공간에서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었다. 그 한 마리 귀뚜라미를 생각하며 그 뒤 두 달이나 아파트에 소독을 하지 않았다. 징그러운 바..
'사랑은 교통사고와 같다.'라고 누군가 말하였다. 예고도 없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 별안간 맞닥뜨리게 된다는 뜻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느닷없이 찾아드는 드라마틱한 사랑은 아닌 게 아니라 사고라 할만하다.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알 수 없는 운명의 휘둘림 속에 속수무책으로 이끌려들게 된다. 느닷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봄도 그렇게 사랑처럼 온다. 소매 끝을 붇잡는 겨울의 등쌀에 꽃망울이 주춤거려 올해는 봄이 좀 늦을 거라 하였다. 삼월 말인데도 춘설이 분분하여 겨울옷을 채 들여놓지 못했다. 겨우 며칠 햇살이 좋았던가. 꽃송이가 벙글고 꽃잎이 터지더니 사위는 온통 꽃구름 속이다. 팝콘이 터지듯 폭발해버린 봄, 근엄한 얼굴에 일순 번지는 파안대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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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천년사찰 희방사를 감싸고 흘러가는 숲이 울울창창하다. 소백산 아래 고즈넉한 희방사! 불자들이 삼삼오오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이 해사한 잎을 흔든다. 흐르는 계곡물은 감로수처럼 신령스럽다. 숲 향기가 훅 풍기자 맹맹했던 코가 뻥 뚫린다.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 향기가 숲 향기라 한다. 거대한 소백산 숲 향기에 온몸이 경쾌해진다. 희방사로 오르는 길에서 얻는 것들이 많을 것 같아 가슴 또한 설렌다. 자연은 늘 그러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좋다. 서로를 조화롭게 보안하는 자연이라는 웅장한 이치가 길을 나선 나그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들꽃 소소한 이 길은 생경하지 않다. 희방사에서 십 리쯤 떨어진 풍기에서 유년을 보냈기 때문이다. 신작로..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입은 닫고 지갑은 열고…. 수업시간에 카톡하다가 핸드폰 빼앗기지 말고, 선생님께 엉뚱한 질문하지 말고.” 말고, 말고는 내가 공항에서 K 선생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그가 군대 입대하는 날도 그랬었다. 부산에 사는 남학생을 서울에 사는 여학생이 대전역에서 만나 논산훈련소로 데려다 주었다. 입대 당일까지 여학생 앞에서 폼 잡느라 더벅머리 장발이었다. 그가 상사에게 밉보일까 봐 나는 애를 태웠다. 아들이 새 운동화와 가방을 사왔다. 자식이 아비에게 마련해주는 입학선물이다. 먼저 가방에 붙은 태극문양 부터 떼어냈다. 위험한 요소를 없애야 한다. 국제적으로 한국의 장년남자가 가장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계 소매치기나 사기꾼에게 표적이라고 한다.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선호하고..
진한 대추차 한 잔을 아끼듯 마신다. 약간의 한과(漢菓)를 곁들인 차 한 잔에 팔천 원이다. 서민들이 마시기에는 좀 비싼 값이지만 따뜻한 차를 마시자 꽁꽁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는다. 적막한 방에서 홀로 마시려니 괜스레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리운 이성 친구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허전하다. 그가 몹시도 보고 싶다. 차를 마시며 조그만 뙤창문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내다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와를 얹은 돌담이다. 돌담을 따라서 여러 가지 상록수와 낙엽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처마 끝에는 풍경(風磬)이 겨울바람에 ‘땡그랑 그랑’ 소리를 풀어낸다. 우물이 있는 수연산방의 마당에는 주인장이 벌써 크리스마스트리와 클래식한 의자를 장식해 놓았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다소 낯설고 색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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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집사람이 그저 밥이나 축내면서 빈둥거리는 내가 답답하였던지 처가 형제들에게 자리 짜는 재료를 얻어다가 나에게 자리라도 짜라고 성화를 대는 한편 이웃 늙은이에게 자리 짜는 법을 가르쳐 달라 하였다. 내가 하는 수 없이 마음을 누르고 해보니, 처음에는 손에 설고 마음에 붙지 않아 몹시 어렵고 더딘 탓에 하루종일 한 치를 짰다. 이윽고 날이 오래되어 조금 익숙해지자 손놀림이 절로 빨라졌다. 짜는 법이 마음에 완전히 무르녹자 종종 옆 사람과 말을 걸면서도 씨줄과 날줄을 짜는 것이 모두 순서대로 척척 맞았다. 이에 고단함을 잊고 일에 빠져 식사와 용변 및 접객할 때가 아니면 놓지 않았다. 헤아려보건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자는 됨직하니, 잘 짜는 사람에 견주면 여전히 무딘 편이지만 나로서는 크게 나아진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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