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봄비가 꽃잎을 적시던 밤, 가게 문을 닫을 무렵에 한 여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녀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더니 상기된 얼굴로 가게 안을 한 바퀴 들러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진열대에 놓인 나를 발견하더니 아까보다 조금 커진 눈동자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언제나 문 앞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현관문을 드나드는 그녀는 어쩌다 한 번씩 나를 보며 씩 웃어주었다. 급히 뛰어나가다가 그녀의 몸이 나를 툭 스칠 때면 내 가슴에 훈훈한 봄바람이 일었다. 며칠 후 그녀 집으로 몇 개의 택배 상자가 배달되었다. 한참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그녀가 몸에 딱 달라붙는 자전거 ..
나는 가끔 거리를 쏘다닌다. 무슨 목적이나 이해가 있어 나다니는 게 아니라 정신질환자가 할 일 없이 다니는 것처럼 텅 빈 마음으로 걸을 때가 많다. 그렇게 한참 동안 걷다보면 때로는 내가 보이고 세상이 보일 때가 있다. 젊었을 때는 거울 속에서만 나를 볼 수 있는 줄 알았다. 투명한 물체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더럽고 추한 곳은 다듬고, 부족한 부분은 감추거나 달리 하려 애썼다. 그러나 거리를 배회하면서 세상을 마주하고는 거울 속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까 거울 속의 내가 형상의 존재라면 거리에서 얼비친 나는 영혼의 존재였다고나 할까. 거리에는 생명이 있고 삶이 있고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었다. 그것들을 마주하면서 내 영혼도 다듬고 손질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치 거울을 보..
내가 만약 신화 속의 미장부(美丈夫) 나르키소스였다면 반드시 물의 정(精) 에코의 사랑을 물리치지 않았으리라. 에코는 비련에 여위고 말라 목소리만이 남았다. 벌로 나르키소스는 물속에 비치는 자기의 그림자를 물의 정으로만 여기고 연모하고 초려하다가 물속에 빠져 수선화로 변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에코의 사랑을 받았던들 수선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 봄에 피는 꽃으로 수선화에 미치는 자 없으나 유래와 전신(前身)이 슬픈 꽃이다. 애잔한 꽃 판과 줄기와 잎새에 비극의 전설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이왕 꽃으로 태어나려거든 왜 같은 빛깔의 백합이나 그렇지 않거든 장미로나 태어나지 못하고 하필 수선이 되었을까. 쓸쓸하고 조촐하고 겸손한 모양. 기껏해야 창 기슭 화병에서나 백화점 지하실 꽃가게에서 볼 수..
외교부가 지난 19일 외교부 홈페이지 '공공데이터 개방' 코너를 통해 '독도의 사계 이미지' 사진 112장을 공개했다. 이 사진들은 외교부 독도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정부의 공공데이터 사업의 일환으로 공공데이터 포털에도 제공하게 됐다. (외교부 제공) 외교부 독도 > 자료실 > 독도 갤러리 외교부 독도 | 대한민국 외교부 독도 독도,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336호, 독도 동영상, 독도 사진, 독도 정부 입장, 독도 영토주권, 한국 독도 dokdo.mofa.go.kr ♬독도는 우리땅 – 정광태(최초 오리지날 버전) ♬'독도는 우리 땅' 노래 가사 바뀐 거 알고 있었어? / 스브스뉴스
걸음을 멈췄다. 눈길을 잡은 것은 가게 유리창에 붙여진 메모였다. '3월 8일부터 3월 16일까지 신혼여행 갑니다. 3월 17일부터 정상 영업합니다. 죄송합니다.' 가게를 닫게 된 주인장의 이런 사정을 보자 싱긋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가던 길을 쉬 가지 모하고, 다시 글을 읽고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여 집의 내부를 살펴보았다. 뭐하는 가게지? 실내는 깜깜해서 요량할 수 없었다. 몇 발자국 물러나 간판을 살폈다. 간판이랄 것은 없었고 '파스타' '피자'라고 쓴 영문의 글자들이 유리창 위쪽에 포스팅되어 있었다. 출입문도 유리를 끼운 나무틀의 미닫이문이었다. 이탈리안 음식을 파는 간이 분식집 같은 인상이었다. A4 용지에 인쇄를 한 것도 아니고 손글씨를 써서 친절하게 자신의 근황을 ..
달팽이 한 마리가 풀잎 위에 동그마니 앉았다. 더듬이를 세우더니 목을 쭈욱 빼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무게를 지탱할 뼈 한 조각 없는데, 제 몸뚱이만 한 집을 지고 느릿느릿 기어간다. 등에 지고 다니는 저 집이 없다면 달팽이는 천애의 알몸으로 노숙해야 한다. 나도 저리 작은 집이라도 가졌으면 했던 적이 있다. 부모 도움 없이 결혼을 하고 세입자들만 사는 주택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두 번째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 새로운 집주인이 찾아왔다. 우리와 안면을 트려는 줄 알았는데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했다. 단번에 뭉칫돈을 내놓으라니, 조금이라도 깎아 달라 사정했으나 반응은 차가웠다. 집주인은 형편이 안 되거든 다른 집을 알아보라며 등을 돌렸다. 한여름인데도 온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하루아침에..
밖에는 봄비가 소근거린다. 눈이 침침하여 스탠드를 밝히고 씨감자를 쪼개다가 창문을 열었다. 희미한 전광으로 세류 같은 빗줄기가 뿌우연하다. 봄비는 처녀비다. 수줍은 듯 조그맣고 고운 목소리로, 보드라운 손길로 가만가만 대지를 적시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구석구석 찾아 다니고 있다. 가장 작은 풀씨까지 빼놓지 않고 먼 강남의 밀 향기 같은 봄소식을 전해준다. 오늘 낮에 텃밭에 춘채春菜씨를 넣었다. 삽질을 하다 보니 주먹만한 돌멩이가 발밑으로 날아와서 손으로 집으려다 깜짝 놀랐다. 그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몰캉하게 잡히는 개구리였다. 우수 경칩이 지난 지도 꽤 여러 날 되었건마는 겁 많은 개구리는 아직도 흙을 뒤집어쓰고 늦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발기진 개구리는 꾸무럭 꾸무럭 선잠을 터는지 뒷다리를 자맥질..
번 역 문 한 방에서 불길이 일어났는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살아남았습니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겠으나 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스스로 생각건대, 죽기 전의 책무는 오직 선친의 유고(遺稿)를 정리하고 선친의 사적(事跡)을 손수 구비한 다음 입언군자(立言君子)의 글을 얻어 후세에 영원히 인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남아 창자가 썩고 끊어지면서 인리(人理)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 일을 마치지 못한 것이 또 천고의 한이 될까 몹시 걱정입니다. 만약 어르신처럼 선친과 동시대를 살면서 친분을 나눈 분이 시나 글을 지어 은혜롭게 한마디 말로 지하에 계시는 선친을 빛내주신다면, 알려지지 않은 선친의 덕이 드러나고 훗날에도 징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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