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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청도 임당리 마을을 들어서 고샅길을 따라간다. 고택의 흙돌담을 끼고 걸으니 솟을대문이 버티고 섰다. 좌우로 마구간과 방을 거느려 여느 대갓집 대문 못지않다. 이리 오너라 외치면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나올 것 같다.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인적 없고 쓸쓸한 기운만 감돈다. 바깥마당 넓은 터에 사랑채가 휑하니 홀로 서 있다. 사랑채를 한 바퀴 돌아보니 뒤쪽 바람벽에는 오래된 벽에서 흙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 오랜 비바람의 흔적이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빈집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허허롭다. 큰 사랑채의 구조가 특이하다.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으로 정면 네 칸 좌측 두 칸 규모의‘ㅡ’자형 평면 형태이다. 우측 두 칸은 대청이고, 좌측 두 칸은 온돌방이다. 사..
한 때는 문중의 중심으로 자리해오던 종택이 세월의 무게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기왓장 사이에서 잡초가 뿌리를 내리는가 싶다보면 빗물이 새어들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균열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종택의 건재를 그 가문의 흥망과 맞물려 있다고 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중이 손을 모아서라도 종택을 건사하러 드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을 나섰다가도 인근에 종택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얼마간은 무리를 해서라도 들러보고 있다. 이번 걸음도 근처까지 간 김에 둘러보고 온 참이다. 종택치고는 아담한 것이 자칫 제실을 연상시키고 있었지만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을 가까스로 얽어놓은 모양새가 눈시울을 젖어들게 하고 있었다. 누덕누덕 기워놓은 서까래하며 낙숫물 떨어지는 곳이나 맨땅이 드러나 보일까..
은해사 돌담을 낀 자드락길로 접어들었다. 초여름 비는 사붓사붓 내리고 산 벚이 구름처럼 피었던 가지는 연한 초록으로 함초롬히 젖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길 오른편 왼편으로 자유로이 갈마들며 알레그로에서 안단테로 박자를 바꾸어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산새들도 여기저기에서 저마다의 목소리로 낯선 손님을 반겼다. 마치 가라앉은 내 마음을 아는 듯, 이쪽으로 잘 왔다고 귓불을 간질여대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아내와 목소리를 높였다. 욱하는 마음에 집을 나서기는 했으나 마땅히 갈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현듯, ‘길 위에서’라는 TV 리포트에서 본 백흥암 가릉빈가 생각이 나서 비가 내리는데도 길을 나선 참이었다. 가릉빈가(迦陵頻伽)는 극락정토에 깃들어 산다는 극락조의 다른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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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나는 지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어느 무덤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서 있다. 비록 시골 밭둑 한구석에 자리한 초라한 무덤이지만, 그 어느 제왕의 거대하고 위엄찬 왕릉보다 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뜻매김을 해본다. 이 안에는 금은보화나 황금왕관 따위의 물질적 보물이 아닌, 인간의 정신적 유물이 묻혀있기 때문이다. 예천군 지보면 한대마을에 있는 언총은 사오백 년 전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사람이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내뱉는 ‘말(言)을 묻은 무덤’이다. 마을 어른의 말에 의하면 한대마을은 예전부터 각성바지들이 모여 살고 있었는데, 문중들 서로 간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말썽이 잦자, 마을..
우리 도시에서 제일 큰 식당 K가든 지하에 오래 묵혀 놓았던 놋그릇을 닦는다. 사람 가슴께나 오는 커다란 고무 통에 고봉밥처럼 가득 쌓인 놋그릇을 에워싸고 가랑이를 쩍 벌리고 앉은 사십대 후반의 여자들이 둘러 앉아 놋그릇을 닦는다. 담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온도 변화가 별로 없고, 음식에 독성이 있으면 색깔이 변한다고도 하고 살균력이 강해 식중독 균이 박멸 된다는, 이전 왕이나 사대부들의 밥상을 채웠다는 놋그릇은 그 이름만큼이나 주방 식구들과 홀 직원들에게서 상전 대접을 받는 그릇이다. 그 무게는 말할 것도 없고 탕을 담았을 때는 그 뜨거움으로 우리를 쩔쩔매게 만들고 씻을 때는 그냥 닦는다는 말과 박박 닦는다는 말의 차이를 뼈저리게 실감 할 수 있는 힘겨움으로 우리를 쩔쩔매게 만든다. 이전에 짚 풀에..
부엌이 내 차지가 되었을 때 먼저 눈에 띈 것이 한 개의 놋숟가락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놋그릇이 겨울철 식기였던 것은 알고 있었는데 놋숟가락 한 개가 밥상에도 오르지 못하고 허드재비로 푸대접을 받고 있어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나무주걱을 오래 쓰면 한쪽이 닳아서 비뚤어지듯 구리 10분에 아연 3을 섞어 만든 단단한 쇠붙이인 놋숟가락도 거의 직선으로 기울어져 사용하기에는 더욱 편리했다. 양은 솥 바닥에 고소하게 눌어붙은 누룽지를 긁거나 냄비를 태웠을 경우 검댕이를 떼어 내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고향 시골에서도 가마솥의 누룽지를 이 숟가락으로 긁었으리라. 나물을 볶을 때면 묵직하고 튼튼한 놋숟가락이 손에 척 붙는 맛이 있어 어떤 주걱보다 편했다. 양념이나 반찬을 옮겨 담아도 스푼보다 놋숟가락을 먼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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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햇볕 쨍쨍 한낮에 연지 해자 뜰을 걷는다. 잎자루를 든 연잎이 잎을 길쭉하게 오므리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다 마실 듯하다. 더러는 잎을 납작하게 펼치고 검게 고인 물을 덮었다. 분홍 메꽃과 태극 문양 흙길 따라가니 또 하나 둥근 해자가 펼쳐진다. 성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거대한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덩이로 쌓은 성벽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졌다. 돌과 돌 틈에 작고 납작한 돌이 균형을 잡아 울퉁불퉁한 성 벽면을 자로 잰 듯 평평하다. 내가 서 있는 눈높이에 네모난 돌은 모퉁이가 부드러운 곡선을 띤다. 그 위에 각이 진 반듯한 인공 돌이 층층 놓였다. 오목하고 볼록한 직선으로 번갈아 길게 이어졌다. 검버섯이 핀 큰 돌들로 반룡의 몸통이 꿈틀거리는 ..
‘酒전자’. 붉은 글씨가 내 눈을 낚아챘다. 술 酒, 삼수변만 보아도 컬컬한 목이 확 트일 것 같다. 주점이 연상되는 기발한 간판의 글씨에 벌써 불콰한 기운이 가슴 저 안쪽에서 올라오듯, 금방이라도 막걸리가 양은 대접으로 콸콸 쏟아질 것만 같다. 한 잔 걸치고 싶은 최근 무렵, 저 간판이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군상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듯 간판 옆으로 집어등集魚燈처럼 매달린 주전자들은 하나같이 찌그러져 있다. 하기야 점잖은 얼굴로 나올 수 없는 곳이 주점이다. 화풀이라도 할 냥이면 냅다 무언가를 발로 차야할 것, 그러니 주전자가 온전할 리가 없다. 저 양은 주전자가 매끈하다면 대폿집은 서민과 거리가 멀다. 만만한 발길들이 지나갔듯, 화풀이로 내던졌듯, 누런 몰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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