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연못의 수련, 이 어인 일인가? / 김훈1 광릉 숲속 연못에 수련이 피었다. 수련이 피면 여름의 연꽃은 살아있는 동안의 시간 속에서 기득 차고 고요한 순간을 완성한다. 수련은 여름의 꽃이지만 작약, 모란, 달리아, 맨드라미 같은 여름꽃들의 수다스러움이 없다. 수련은 절정의 순간에서 고요하다. 여름 연못에 수련이 피어나는 사태는 ‘이 어인 일인가?’라는 막막한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 나의 태어남은 어인 일인고, 수련의 피어남은 어인 일이며, 살아서 눈을 뜨고 수련을 들여다보는 일은 대체 어인 일인가? 이 질문의 본질은 절박할수록 치매하고 치매할수록 더욱 절박해서 그 치매와 절박으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인데 수련은 그 질문 너머에서 핀다. 수련꽃 핀 여름 연못가에 주저앉은 자와 물 위에 핀 꽃 사이..
봄의 흙은 헐겁다. 남해안 산비탈 경작지의 붉은 흙은 봄볕 속에서 부풀어 있고, 봄볕 스미는 밭들의 이 붉은 색은 남도의 봄이 펼쳐내는 모든 색깔 중에서 가장 깊다. 이 붉고 또 붉은 밭이 남도의 가장 대표적인 봄 풍광을 이룬다. 밭들의 두렁은 기하학적인 선을 따라가지 않고, 산비탈의 경사 각도와 그 땅에 코를 박고 일하는 사람들의 인체 공학의 리듬을 따라간다. 그래서 그 밭두렁은 구불구불하다. 밭들의 생김새는 "뱀과 같고 소 뿔과 같고 둥근 가락지 같고 이지러진 달과 같고 당겨진 활과 같고 찢어진 북과 같다." (목민심서)라고 다산은 말했다. 가로 곱하기 세로로 그 땅의 면적을 산출해내는 지방 관리들의 무지몽매를 다산은 통렬히 비난했다. 가로 곱하기 세로가 합리성이 아니고, 구부러진 밭두렁을 관념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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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월의 산들은 새로운 시간의 관능으로 빛난다. 봄 산의 연두색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수목의 비린내는 신생의 복받침으로 인간의 넋을 흔들어 깨운다. 봄의 산은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서, 지나간 시간의 산이 아니다. 봄날, 모든 산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산이고 경험되지 않은 산이다. 그리고 이 말은 수사가 아니라 과학이다. 휴일의 서울 북한산이나 관악산은 사람의 산이고 사람의 골짜기다. 봉우리이고 능선이고 계곡이고 간에 산 전체가 출근길의 민원 지하철 안과 같다. 평일 아침저녁으로 땅 밑 열차 속에서 비벼지던 몸이 휴일이면 산에서 비벼진다.휴일의 북한산에서는 사람이 없는 코스를 으뜸으로 치고, 점심 먹을 자리를 찾을 때도 사람 없는 자리를 다투다가. 사람 없다는 코스로 너도나도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
천상병의 마음이나 체취의 조각들에 관하여 말해야 하는 것은 지극한 고통이다. 그의 표정이나 목소리, 그의 어법, 그의 걸음걸이, 그의 웃음, 그의 음색, 그의 밥 먹는 모습, 그의 조는 모습, 그의 집, 그의 음악, 그의 신발, 그의 옷, 그의 얼굴, 그의 눈곱, 그의 입가의 침버캐, 그의 주머니 속의 천 원짜리 두 장, 그의 선글라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그의 시에 관하여 말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무구한 것들은 인간의 말에 의하여 훼손되거나 엉터리로 규정되지 않는 지복(至福)을 누릴 권리가 잇을 터인데, 천상병의 웃음소리와 그의 입가의 침버캐와 그의 주머니 속의 천 원짜리 두 장이 그러하다.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천상병은 ‘백치 같은’이라고나 말해야 할 무구함과, 이 세상을 향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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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도포를 입은 양반이 선비를 만나 통성명을 하려고 마주 엎드려 절을 하는데, 초랭이가 달려와서 엉덩이로 양반의 머리를 깔고 앉는다. 정자관을 쓴 양반의 이마가 흙바닥을 찧는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양반이 사대부의 자손이라고 말하니, 선비는 팔대부의 자손이라고 비꼬고, 양반이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하니, 선비는 팔서육경을 읽었다며 빈정댄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웃을 때는 턱이 먼저 덜렁거린다. 콧등 좌우에 붙어있는 밤톨보다 굵은 콧방울에는 움푹 뚫린 콧구멍이 벌름댄다. 눈 아래에서 광대뼈로 이어지는 길고 두툼한 근육이 입꼬리를 당겨서 귀에 건다. 실눈을 감싸고 있던 눈꺼풀이 길게 호를 그리며 내려오다가 볼록한 애교살의 끄트머리를 잡고 관자놀이까지 휘달린다. 미간에..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사쿠라꽃 피면 여자 생각에 쩔쩔맨다. 어느 해 4월 벚꽃 핀 전군가도全群街道(전주-군산 도로)를 자전거로 달리다가, 꽃잎 쏟아져 내리는 벚나무 둥치 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내 열려지는 관능에 진저리를 치면서 길가 나무둥치에 기대앉아 있었다. 나는 내 몸을 아주 작게 옹크리고 쩔쩔매었다. 온 천지에 꽃잎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나무둥치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라보면, 만경 평야의 넓은 들판과 집들과 인간의 수고로운 노동이 쏟아져 내리는 꽃잎 사이로 점점이 흩어져 아득히 소멸되어 가고, 삶과 세계의 윤곽은 흔들리면서 풀어지면서, 박모의 산등성이처럼 지워져 가는 것이었는데, 세상의 흔적들이 지워져 버린 새로운 들판의 지평선 너머에는 짐승들의 어두운 ..
가을에는 바람의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 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숲을 흔들 때, 소리를 내고 있는 쪽이 바람인지 숲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런 분별은 대체로 무가치하다. 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를 바람소리라고 한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 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 습기가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고 그 마른 바람이 몰려가면서 세상을 스치는 소리는 투명하다. 태풍이 몰고 오는 여름의 바람은 강과 산맥을 휩쓸고 가지만, 그 압도적인 바람은 세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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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굴뚝에서 피어난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듯하더니 주흘산을 향해 허리를 굽힌다. 낯익은 냄새가 코끝에 스며든다. 달덩이가 망댕이가마 속에서 떠오를 채비를 하는 걸까. 열기와 사투를 벌이는 것은 아닐까. 입술 앙다물고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각기삭골(刻肌削骨)의 시간을 견디느라 밤잠을 설쳤으리라. 문경 초입에 들어서니 조령천변 운무가 화들짝 가슴에 안긴다. 계곡에 부는 산바람과 더불어 닿은 곳은 국가 무형문화재 전수관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이라고 쓴 석조 조형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조선 영조 이래 300년 맥을 이어온 사기장인 백산 김정옥 도예 명장의 전수관이다. 어디선가 발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바쁘게 들린다. 작업장에 들어서니 수비를 거친 흙덩이를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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