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바람이 휘파람을 분다. 죽음을 알리는 소리다. 무거운 소식인데 빠르게 날아온다. 이번 부고는 뜻밖이다. 「대전고등학교 동문 김○○ 심장마비로 사망 충남대병원 장례식장」 휴대전화 메시지로 소식을 접하고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름이 가물가물한 탓이다. “글쎄, 나도 잘 모르는 이름인데. 칠백 명이 넘는 동기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 물어물어 알아낸 건 죽은 동기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것 외에 공유할 기록이 없다. 딱히 모른 체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얼굴조차 기억에 없는 동기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난감했다. 얼마의 틈에서 고민했다. 소식을 자주 나누는 친구들과 연락 끝에 30여년 만에 동창들 얼굴이나 보자는 명목으로 문상에 나섰다. 사람은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걸 잘해야 한다. 헤..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d0qWOg/btqKC9FwI8F/zEMkmtUvMCvKf2whoNoAY1/img.jpg)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밤꽃이 피는 유월이다. 군위 한밤마을 밤나무도 한창 밤꽃 향기를 흩날린다. 밤이 크다고 해서 ‘한밤’인데, 밤보다는 돌담에 더 눈길이 간다. 멀리서 보면 담도 마치 알밤으로 쌓은 듯한 착각이 든다. 가벼운 행랑 하나 메고 미로처럼 마을을 돌고 도는 돌담길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유서 깊은 곳이 많다. 부계홍씨종택, 대청마루, 남천고택에서 옛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250년 동안 마을을 지킨 노거수 잣나무의 위용과 대율사 석불입상의 자비로운 미소를 만날 수도 있다. 목마르면 예주가에 잠깐 들러 잘 빚은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이를 찾아 골목을 걷다 보면 돌담의 매력에 빠져든다. 돌담에서 돌들은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아랫돌, 윗돌, 누..
지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은? 치타다. 순간 최고 속력이 시속 120킬로미터 정도로 100미터를 3초에 완주하는 속도다. 톰슨가젤이나 타조는 시속 80킬로미터, 지구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사나이 우사인 볼트는 시속 37킬로미터 정도다. 치타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달렸다면 인간은 도망치기 위해 달렸을 것이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사나운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을 것이다. 배고파 훔친 겉보리 한 되, 고구마 몇 알을 앗기지 않기 위해, 곤장을 맞고 무리에서 내쫓기는 치욕을 면하기 위해서도 목숨 걸고 달리고 달려야 했을 것이다. 싸울까 튈까 죽은 척할까를 매 순간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속도의 뿌리는 애초 그렇게 두려움에 잇닿아 있었을 것이다. 생존의 필수조건..
아기가 뒤집기를 시작했다. 생후 4개월 어린것도 제 고집이 있는지 한사코 왼쪽으로만 뒤집으려 한다. 끙끙거리다 성공하니 제 성취에 양양해져 낯빛이 금세 해사해진다. 풍뎅이처럼 아등바등, 땅 짚고 헤엄치기를 연습하다가 두 손 두 발 치켜들고 이륙 연습도 한다. 가르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알아서 순서를 밟는 것, 생각할수록 신통방통이다. 저만치 놓여 있는 삑삑이 장난감에 닿지 못한 아기가 성질을 못 이겨 울음을 터트린다. 흔들거리는 모빌이나 바라보던 아이 안에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손안에 넣고 싶은, 욕망이란 게 생기기 시작한 거다. 프로이트 심리 발달 단계로 보면 아이는 지금 구강기에 있다. 주먹을 빨고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입에 닿는 모든 걸 빨고 싶어 한다. 욕구와 표현이 입에 집중되어 배고프면 울고 ..
강이 뒤채고 있다. 낮에는 무심한 듯 천연스럽던 강물이 밤이 되자 제법 일렁이며 흐른다. 다 큰 남자의 등줄기 같이 울룩불룩한 근육질을 들썩거리며 속울음을 삼키고 있는 것도 같다. 강을 잠 못 이루게 하는 건 무엇일까. 아픔이나 그리움, 작은 기억마저 증폭시키는 밤의 신묘한 마성 때문일까. 나는 지금 양화나루 선착장에 와 있다. 말이 선착장이지 강물 위에 떠 있는 배 모양의 휴게소다. 배 안쪽으로 '아리수'라 하는, 예쁜 이름의 한식집이 있다. 내가 앉아 있는 카페의 이층에도 뭔가 하는 양식당이 있다. 여름날 저녁이면 나는 가끔 이 곳에 온다. 커피 맛이 그런 대로 괜찮은 데다 내가 좋아하는 한강을 바라보며 강바람을 마구마구 쏘이는 게 좋다. 가로등 그림자가 줄줄이 얼비쳐진 강 저편 도로 쪽으로 자동차의..
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 뭇 생명의 발원지가 바다이듯, 길도 오래 전 바다에서 올라왔다. 믿기지 않는가. 지금 당장 그대가 서 있는 길을 따라 끝까지 가 보라. 한 끝이 바다에 닿아있을 것이다. 바다는 미분화된 원형질, 신화가 꿈틀대는 생명의 카오스다. 그 꿈틀거림 속에 길이 되지 못한 뱀들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왁자하게 우글대고 있다. 바다가 쉬지 않고 요동치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로운 흙내에 투명한 실뱀 같은 길의 유충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어서이다. 수천 겹 물의 허물을 벗고 뭍으로 기어오르고 싶어 근질거리는 살갗을 비비적거리고 있어서이다. 운이 좋으면 지금도 동해나 서해 어디쯤에서 길들이 부화하는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물과 흙, 소금으로 반죽된 거무죽죽한 개펄 어디, 눈부신 ..
수상한 손님이 찾아 왔다. 생면부지의 불청객, 두드러기다. 더러 소문을 듣기야 했지만 아무래도 이 작자는 엉큼한 데가 있는 것 같다. 밖에서 일을 보는 낮 동안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다가, 혼자 있거나 한가하다 싶을 때, 하루 일을 마치고 자리에 들려할 때, 슬금슬금 마수를 뻗쳐온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스멀스멀 옷 속으로 기어 들어와 이제부터 저하고만 상종하자 한다. 반갑지 않은 유혹, 적과의 동침이다. 놈은 처음, 시계나 고무줄 자국 같은, 압박 부위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으면 어렵잖게 토벌할 수 있었으련만, 무관심 무저항으로 맞서려 했던 것이 사기만 높여준 꼴이 되었다. 밖에 나갔다 들어설 때 잠깐씩만 기척을 보이던 놈이 요즘엔 게릴라처럼 무시로 출몰한다. 내 등판을 ..
발톱 깎는 소리가 방안을 울린다. 분주한 일상, 발톱 깎는 시간만큼 오롯한 시간도 없다. 바람은 고요의 바닥을 훼치고, 창밖엔 어린 별들이 글썽거린다. 기다릴 사람도 그리운 사람도 없는 저녁, 신경은 발톱 끝에 집중되어 있다. 적막한 공간에 파종되는 소리, 소리들....... 무슨 씨앗 같기도 하고 섬세한 금은세공품 같기도 한 파적破寂의 음향이 시간의 고즈넉한 결 위에 미세한 족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손톱은 몇 주에 한 번 깎고 발톱은 몇 달에 한 번 깎는다. 손톱이 발톱보다 빨리 자라는 건 손가락이 발가락보다 부지런해서가 아니다. "손톱은 슬플 때 자라고 발톱은 기쁠 때 자란다" 던 시인의 통찰이 백번 옳다. 냄새나는 양말 속에서, 음습한 신발 속에서, 깜깜한 이불 속에서 발톱은 야금야금, 마디게 자란..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