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진(眞)’이라 말하거나 ‘초(肖)’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가(假)’와 ‘이(異)’의 뜻이 내재되어 있다. 夫語眞語肖之際 假與異在其中矣 부어진어초지제 가여이재기중의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巖集)』권7 별집(別集)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해 설 ‘세상엔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받기 쉽다.’ 영화 속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이다. 나는 박지원의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이 대사가 떠올랐다. 박지원은 「녹천관집서」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글 짓는 법’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더 나아가 ‘우리의 삶’ 혹은 ‘나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박지원은 이 글에서 옛글을 모방하여 글 쓰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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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가을 속에 여름이 갈마들어 있다. 그 여름 염천 뙤약볕 속의 짙푸른 은행나무를 보면서도 내심은 달포가 좀 더 지나면 샛노란 황금나무로 물들어 있을 그 휘황찬란함을 떠올렸다. 그러니 저 황금빛 노랑의 갈무리 속에 저 여름의 진초록 생색이 다스려져 있다. 어머니의 생전에 한 번 다녀왔으면 싶어 내심 점지해 둔 곳이 운문사 도량이었다. 그 경내의 늦가을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의 정취를 당신 눈 안에 넣어드리고 싶었다. 수백 년 된 샛노란 노거수(老巨樹)는 당신이 보셨더라면 저승에 가셔서도 눈에 삼삼하니 수시로 아들 생각을 하기에 맞춤한 선처가 아니었을까. 사람으로 치면 지워지지 않는 눈부처 같았을 것이다. 혼자 갔지만 어머니 생각이 오롯하니 내 마음에 팔짱을 끼고 풀지 ..
꽃에는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대수롭지 않는 꽃도 밝고 예쁘게 보이고, 기분이 우울할 때는 많이 아름다운 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울로 꽉 차 있는 마음 안에 꽃이 들어갈 공간이 없는 까닭이다. 어떤 사람은 거처하는 방에 항상 꽃을 두고 살아간다. 아름다운 것도 밤낮으로 항상 보고 있으면 심상해진다. 없다가 있어지면 새롭고, 있다가 없어지면 아쉽다. 그러한 변화를 위해서 나는 꽃병을 때때로 방에 갖다 놓는다. 새 꽃을 꽂아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꽃이 곧 사람의 표정으로 보인다. 맑고 밝은 얼굴에 그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마주 앉는다. 그 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꽃을 꽂아 주었다면 어떠한 감정이 될까. 꽃의 빛깔, 꽃의 형태, 꽃에서 풍겨 오는 분위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신이..
녹슨 철문을 민다. ‘삐거덕’ 된소리를 낼 뿐 그만이다. 팔에 힘을 실어 밀어제치자 그제야 무거운 몸을 비켜선다. 마당은 그새 풀밭이 다 되었다. 인기척에 놀란 잡초들의 수런거림에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내가 오히려 뒷걸음질이다. 자기들이 주인인 양 기세가 대단하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태어나는 질긴 목숨일진대, 두 달여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오죽할까. 툇마루는 더욱 가관이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흙 부스러기들을 잔뜩 안고 있다. 올려다보니 천정 한쪽이 허물어져 흙덩이 몇이 또 떨어질 기세다. 민망하여 더이상 볼 수가 없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닌 게야. 하기야 훈기도 없는 집에 무슨 낙으로 제 몫들을 하려고 들겠나. 살 비비며 눈 맞춤해야 사랑이든 미움이든 생겨날 게 아닌가. 이들에게도 청춘은..
지난 6월 1일 일요일이었다. 친구의 화실을 찾았다가 그와 함께 드라이브나 하려고 차를 세워둔 골목길로 들어섰다. 조금 전 화실로 들어설 때만 해도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져 사람들이 종종걸음쳤었는데, 어느새 비 그치고 길바닥은 흥건히 젖어 있었다. 차 문을 열려할 때 문득 나는 보았다. 바알간 석류 꽃잎 하나가 물기가 닦이지 않은 창유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머리를 쳐들어보니 차를 세워둔 2층집 담벼락 위로 석류꽃이 한창이었고, 자욱한 잎새에서 아직 간간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걸기 전 나는 이번엔 창유리 안쪽에서 비에 젖어 들러붙은 석류 꽃잎을 잠깐 보았다. 그리고 출발하면서 와이퍼를 작동시키자 바알간 꽃잎은 몇 번 창유리 이쪽저쪽으로 밀려다니다가 어느새 길바닥으로 떨어져 나가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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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강물은 개경포에 이르러 긴 숨을 고른다. 철석, 철석, 연둣빛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기를 반복하다가 강둑 포구를 살짝 때리고 가기도 한다. 산 그림자가 내려앉은 적막한 낙동강의 해 질 녘,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옛날, 이 나루터에서 일어났던 전설적인 이야기가 수면 위로 여울져간다. 조선 초(1398년) 봄, 한적하던 고령 개경포에는 때 아닌 시끌벅적한 소리로 강마을은 부산했다.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고을 원님도 행차하고, 승려, 구경나온 포구 사람들과 어린아이들까지, 심지어 소달구지까지 동원되어 줄지어 서 있다. 길 한쪽에는 조선팔도에서 오늘의 이 행사를 참관하러 온 의관을 갖춘 선비들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번 이운 행사에 육신 공양을..
나뭇광으로 쓰이는 지하실에는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口)자 모양의 쇠틀을 벽에 붙인 함실아궁이다. 마치 거대한 아귀 한 마리가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형국이다. 내 키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그 아궁이는 네모난 쇠판때기로 막지 않는 한, 일 년 열두 달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큰 물고기가 아가리를 마음껏 벌리고 먹을 것을 기다리는 모양 같았다. 생뚱맞긴 하지만, 방고래 속을 엄청 큰 물고기의 뱃속으로 상상을 하면 재밌다. 물고기의 먹을거리로 아궁이에 땔감을 지피는 나의 임무는 날마다 지속되었다. 쇠판때기 문을 열고 긴 굴속 같은 어웅한 아궁 안을 들여다보면 바닥에는 어제 먹다 남은 나뭇재만 소도록이 쌓여 있다. 부지깽이로 재를 뒤적거려 보면 꼬마별 같은 불씨들이 요리조리 숨바꼭질을 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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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술을 대표하는 장르는 아시다시피 '조각'입니다. 미술사학자 양정무 교수가 그리스․로마의 문명과 미술을 다룬 《난생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제2권에서 상찬해 마지않았던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조각은 "운동감으로 보든 인체 표현으로 보든" 세계 조각사에 길이 남을 명품으로 꼽힙니다. 다만 안타까운 건 그리스 조각의 원본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죠. 세계의 유명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조각품들은 대부분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입니다. 세계미술사에서 적어도 조각에 관한 한 그리스와 로마가 한 데 묶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그리스 조각에도 구체적인 개인을 새긴 이른바 '초상 조각'은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사람은 몰라도 산 사람의 얼굴을 새기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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