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라는 새의 울음소리는 늑대와 같다 / 박정대 아침마다 아비라는 새가 와서 울면/ 늑대가 우는 줄 알았다/ 가끔은 사람이 웃는 줄 알았다/ 간밤 늦게까지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창밖엔 눈이 내렸는지 온통 하얀데/ 아침부터 동백나무 숲이 창가로 와/ 나를 깨우며 우는 줄 알았다//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빅또르 쪼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신고 있는 운동화가 지나온 길을 말해주었다/ 팔에 돋아난 힘줄은 알타이산맥보다 더 선명했다/ 그가 마시던 잔에는 어떤 노래가 담겨 있었던 걸까/ 그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또 다시/ 다음에 부를 노래를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마다 아비라는 새가 와서 울면/ 늑대가 우는 줄 알았다/ 가끔은 그가 ..
황금나무 아래서 / 권혁웅 황금나무를 본다/ 저 나무는 세계수, 하늘을 향해 직립한 채/ 부채 모양의 금빛 엽편(葉片)들을 쏟아낸다// 나무가 이곳에 뿌리내린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저 금빛 환상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나무 위에 집을 짓는 족속이었을까// 아까부터 젊은 연인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제단에 앉아 있다 저 신성한 이들의 황금시대를/ 기록할 문자가 나에겐 없다// 다만 나는 내 안에 기식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금빛 바람 위에 실어 보낼 뿐이다// 내 몸을 온통 물들이는 황금나무를 보며/ 나도 몇 번의 제의를 거쳐 온 듯하다/ 마르고 헐벗은 가지가 푸르고 노란빛으로/ 거듭 생을 치장하는 동안/ 내게도 두어 편 격절과 비약의 연대기가 있었다/ 이제 나무에 기대어 나는 내가 꾼 꿈들이/ 신..
감옥 / 강연호 그는 오늘도 아내를 가두고 집을 나선다/ 문단속 잘 해, 아내는 건성 듣는다/ 갇힌 줄도 모르고 노상 즐겁다/ 라랄랄라 그릇을 씻고 청소를 하고/ 걸레를 빨며 정오의 희망곡을 들으며/ 하루가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해가 짧아지네/ 아내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상추를 씻고 된장을 풀고 쌀을 안치는데/ 고장난 가로등이나 공원 근처/ 그는 집으로 가는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맨다/ 그는 혼자 술을 마신다/ 그는 오늘도 집 밖의 세상에 갇혀 운다// 비단길 1 / 강연호 내 밀려서라도 가야 한다면/ 이름만이로라도 아름다워야지 비단길/ 허나 지나는 마음 쓸쓸하여 영 자갈밭일 때/ 저기 길을 끌어가는 덤불숲 사이로/ 언뜻 몸 감추는 세월의 뒷모습 보인다/ 저렇게 언제나 몇 걸음 앞서 장난치며/ 어디..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1934년 2월 《문학》제2호에 실렸다. 시(詩) / 김상용 골짜기를 혼자 거닐 때……. 별안간 무슨 소리고 내고 싶은 충동이 난다. 입술을 새 주둥아리처럼 한데 모아야겠다. 새 주둥아리로 압축되었던 '김'이 질주한다./ 그 소리가 (분명 소리리라) 건너편 절벽에서 반발한다. 곳곳에 작은 작열의 불꽃. 이때 나의 새 발견이 있다 하고 가슴이 외쳐준다. 경이다./ '시(詩)'란 작열이다. '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 해서 죄는 안 된다. '돌'이 ..
어머님에의 헌시 / 박두진 오래 잊어버렸던 이의 이름처럼/ 나는 어머니 어머니라고 불러보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보면/ 나는 먼 어렸을 때의 어린 아이로 되 돌아가// 그리고 눈물이 흐르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입을 떨 때/부르던 첫 말/ 그 엄마 지금은 안계시고/ 이 만큼이나 나이가 들어서야/ 어머니 어머니라는 이름의 / 뜻의 깊이를 아네// 애뙤고 예쁘셨던/ 꽃답고아름다우셨을 때의/ 어머니보다는/ 내가 빨던 젖이/ 빈 자루처럼 찌부러지고/ 이마에는 주름살/ 머리터럭 눈같이 희던 때의/ 가난하고 슬프신/ 그 모습 더 깊이 가슴에 박혀/ 지금도 귀에 젖어/ 음성 쟁쟁하네/ 지금 이렇게 나 혼자 외로울 때/ 마음 이리 찢어지고/ 불에 타듯 지질릴 때/ 그 어머니 지금// 내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
후렴 / 김명인 어머니가 후렴처럼 물으신다, 늬 누고?/ 수없이 일러드린 그 물굽이다, 콱콱 결리는/ 가슴속 복면들과 마주서면/ 어디선가 돛폭 구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몇 년째 벗어나지 못한 무풍지대에/ 한 점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풍파에 펼쳤다면 격랑 속일 텐데/ 어머니는 여러 해째 같은 바다를 헤메신다/ 후렴조차 없다면 거룻배는/ 돌아서지 않는 썰물에 휩쓸린 것이다//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
춤 / 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 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인다/ 발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녁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멍 / 박형준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
꼭지 /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하관 / 문인수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