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자서(自序) / 김혜순 시는 말씀이 아니다. 말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장르는 운명이다./ 나는 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편안히 안주한 시들은 싫..
풍경 / 심보선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 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 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나온다. ..
가족의 휴일 / 박준 아버지는 오전 내내/ 마당에서 밀린 신문을 읽었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종로에나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은 찌고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애호박을 가져와 썰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마을버스 차고지에는/ 내 신발처럼 닳은 물웅덩이/ 나는 기름띠로/ 비문(非文)을 적으며 놀다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바퀴에/ 고임목을 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동생 / 박준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탕탕탕 뛰어 귓속의 강물을 빼내지 않으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여자아이가, 밤에 소변보러 갈 때마다 강가로 불러낸다고 했습니다 입 속은 껍질이 벗겨진 은사시나무 아래에서도 더러웠고요 먼 산들도 귀울림을 앓습니다// 강에 일곱이 모여 가서 여섯이나 다섯으로 돌..
낙화(落花)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 이형기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아, 해바라기여 / 윌리엄 브레이크 아, 해바라기여! 시간에 지쳐서/ 태양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헤아리며/ 나그네의 여정이 끝나는/ 저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을 찾는다// 욕망으로 수척해진 젊은이와/ 백설의 수의 걸친 파리한 처녀가/ 그들의 무덤가에서 일어나/ 가기를 열망하는 나라// 그 곳은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자 하는 곳이니라.// 첫사랑 / 괴테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날/ 그 첫사랑의 날을,/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시절의/ 그 사랑스러운 때를,//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낙엽 / 레미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 / 장석주 1/ 후생의 아이들이 이마를 빛내며/ 동과 서편 흩어지는 바람 속을 질주한다./ 짧은 겨울해 덧없이 지고/ 너무 오래된 이 세상 다시 저문다./ 인가 근처로 내려오는 죽음 몇 뿌리/ 소리없이 밤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 2/ 회양목 아래에서/ 칸나꽃 같은 여자들이 울고 있다./ 증발하는 구름같은 꿈의 모발,/ 어떤 손이 잡을 수 있나?// 3/ 밤이 오자 적막한 온천 마을/ 청과일 같은 달이 떴다./ 바람은 낮은 처마의 불빛을 흔들고/ 우리가 적막한 헤매임 끝에/ 문득 빈 수숫대처럼 어둠 속에 설 때/ 가을 산마다 골마다 만월의 달빛을 받고/ 하얗게 일어서는 야윈 물소리.// 4/ 어둠 속을 쥐떼가 달리고/ 공포에 떨며 집들이 긴장한다.// 하나..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집] 목차 1~81 1. 바다를 본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2. 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3. 끊을 수 없다 성산포에서는 끊어도 이어지는/ 바다 앞에서 칼을 갈 수..
바라춤 -서장 / 신석초 환락은 모두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어라. ―싯타르타//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레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장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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