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 / 이하석 비슬산의/ 숭엄과 신화의 바위가/ 검은 속 왈칵왈칵 쏟아내어/ 질펀한 서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 물 대구시내 들어오는/ 가창 끝머리쯤에서/ 맑은 죽음들 품어 쓰다듬는 할머니가 떠먹고,/ 한바탕, 서러운 술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 깨움을 들고서야 겨우,/ 어미 강이 되는 것입니다./ 수달이든 왜가리든 고라니든 인간이든/ 선 것들 입에 젖 물린 채/ 마구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 죽은 이들의 자식들 여전히 여기서 자라기에/ 대구분지는 그렇게 문득 또, 환하게/ 젖는 것입니다./ 한바탕, 새로 저항해야,/ 깨어나는 것입니다.// 신천 / 이하석 미아처럼 헤매던 나사 굴러 와 붉은 얼굴로/ 자갈 틈 비집고 든다, 여뀌덤불 밑/ 피라미 아가미 때리며, 젖은 흙 걷어차며,/ 해일 ..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에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라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
의자 / 조병화 1// 그 자릴 비워주세요/ 누가 오십니까/ "네"// 그 자릴 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가 오십니까/ "네"// 그 자릴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누가 오십니까/ "네".// 2// 그렇습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아무런 생각 없이/ 잠시 있는 자리/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아무런 딴 생각 없이/ 잠시 머물고 있는 자리/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미안합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3// 내일에 쫓기면서/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지금 내가 앉아 잇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시간의 숙소를 더듬으며/ 지금 내..
O와 o / 오은 너 O 맞지? 낯선 이의 목소리에 몸이 절로 쭈그러들었다. 당시 나는 벤치에 앉아 모든 생각은 일정 정도는 딴생각이라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데로 쓰는 것이 생각이니까. 머릿속이 흔들려야 하니까. O 맞네, 맞아! 낯선 이가 느닷없이 손뼉을 치는 바람에 나는 흠칫 놀랐다. 낯섦과 느닷없음이 겹쳐 공포가 되었다.// 무방비 상태일 때는 별도리 없이 위축된다. 오후 두 시에도 그렇고 새벽 두 시에도 마찬가지다. 밝아서 부끄럽고 어두워서 무섭다. 위축된다고 밝히고 나니 몸뿐 아니라 마음도 덩달아 작아졌다. 위축될 때마다 나는 확신한다. 몸과 마음은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몸의 밀도가 낮아질 때마다 마음에도 숭숭 구멍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O는 대답하지 않는다. 주저하는 기색도 없..
여름의 애도 / 이영주 비 오는 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어머니는 부서진 날개를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옆구리일까요. 그때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털 뭉치처럼 온몸이 가려웠었죠. 죽은 사람이 두고 간 것인데. 어머니는 중얼거리다 말고 빗물이 쏟아지는 마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발자국이 지워졌습니다. 어두운 자리 하나만 남아서 점점 깊어지고 있었죠. 모든 게 빗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인데. 너의 할머니는 이것을 두고 갔구나. 우산을 들고 어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을 듣지 못하고 나는 털 빠진 개처럼 옆구리를 긁고 있었죠. 개다 만 빨래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시간. 떠내려가지 못한 날개를 건져 올린 것은 어머니입니다. 찢기고 바스러진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다..
아카이브 / 황인찬 이 계단을 오르면 집에 이른다/ 제비들이 창턱에 앉아 뭐라 떠들고 있다/ 그것이 여름이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 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인 줄을 알고//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마다 여름은 창턱을 떠나 날아갈 준비를 한다// 이 계단은 집을 벗어난다// 여름에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여름이 이리저리 피어 있는 풍경이다/ 낮은 풀들이 한쪽으로 밟혀 누워 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이 누적 없는 반복을 삶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 시의 서정적 일면이다// 구관조 씻기기 / 황..
유언 –아들, 딸에게 / 류근 절대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 되지 말아라./ 희생하는 사람 되지 말아라./ 깨끗한 사람 되지 말아라./ 마음이 따뜻해서 남보다 추워도 된다는 생각하지 말아라./ 앞서 나가서 매맞지 말아라./ 높은 데 우뚝 서서 조롱 당하지 말아라./ 남이 욕하면 같이 욕하고/ 남이 때리면 같이 때려라./ 더 욕하고 더 때려라./ 남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웃어주지 말아라./ 실패하면 슬퍼하고 패배하면 분노해라./ 빼앗기지 말아라./ 빼앗기면 천배 백배로 복수하고 더 빼앗아라./ 비겁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비겁해라./ 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하느님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큰 교회 다녀라./ 세상에 나쁜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부끄러운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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