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열대여섯 살 적 단오 무렵, 할머니는 앓고 일어난 나를 앞세우고 윗말 진외가에 가셨다. 진외가에는 기력이 쇠진한 진외할아버지께서 드시는 개장국이 늘 가마솥에서 고아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게 그 개장국을 얻어 먹여서 원기를 돋워 주려는 속셈이셨던 것 같다. 황금 햇살 아래 누런 보리밭 사잇길로 어질어질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할머니를 따라간 기억으로 보아서 그때 나는 몹시 쇠약했던 모양이다. 진외가집은 식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조용했다. 할머니와 나는 한약 내가 진동하는 사랑에 들어 진외할아버지께 절을 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얀 진외할아버지가 형형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시며 헐헐 숨찬 소리로, 한참 클 놈이 제 할아비를 닮아서 시원치 못하다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대청에 나와서 진외할머니께 인사..
그랬다지요 /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사람들은 왜 모를까 /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벗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
지방관아 아전의 집, 품격을 못 갖춘 거실 벽면에 길이 170센티미터, 폭 50센티미터쯤 되는 서예(書藝)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액자는 열네 자의 한자를 초서로 쓴 것인데, 내 얕은 진서(眞書) 실력으로는 고작 여섯 자밖에는 알 수가 없었다. 초서라 모르는 글자를 옥편으로 찾아볼 수도 없었다. 글자의 앞뒤를 어림짐작으로 맞춰 가며 유추해석을 시도해 보았으나 도저히 해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만 표구(表具)의 용도로만 걸어 두고 볼 뿐이었다. 내용을 알고 모르고 간에 허전한 벽면에 잘 만든 표구가 한 점 환경정리용으로 걸려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직 친구들 외에는 이 액자의 내용에 대해서 물어 본 사람이 없었다. 다행한 일이다. 우리 집에는 아직 이 액자의 내용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만큼 서..
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놓아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것이니까 40여 년 가까이 된 물건이다. 낡고 물이 바래서 누더기 같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흔치 않은 귀물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어?” 내가 반색을 하자 아내가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잘 간수를 해서 그렇지.” 그리고 “이제 버릴까요?” 하고 나를 의미심중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분명히 누비처네에 대한 나의 애착심을 알고 하는 소리다. “놔둬.” 그러자 아내가 눈을 흘겼다. ‘별수 없으면서-’ 하는 눈짓이다. 그것은 삶의 흔적에 대한 애착심은 자기도 별수 없으면서 뭘 그리 체를 하느냐는 뜻이다. 나는 아내의 과단성이 모자라는 정..
크리스마스카드는 젊은 날 연인 사이에 주고받는 애틋한 마음이고, 연하장은 세상 물정 아는 사내들이 주고받는 우정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다. ‘근하신년(謹賀新年)’이나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나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덕담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내게는 그리 느껴진다.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을 주고받아 보지 못한 나의 젊은 날은 너무 가난해서 섣달그믐쯤 노을진 빈 들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혼자 서 있는 것처럼 처연(然)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 크리스마스카드는 낯선 데 비해서, 연하장은 입던 옷같이 친숙하고, 간혹 잔잔한 추억도 한둘쯤은 깃들어 있다. 그 중하나가 장래가 불확실한 젊은 날 정섭이와 주고받은 눈[雪]물인지 눈[眼]물인지에 젖은 연하우편엽서로 된 연하장이다. 고교를..
그날,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건강 공단입니다. 저는 보험료 환급 담당 백재현입니다.” “공단에서 환급금으로 69만 원을 돌려드릴 예정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때다. ‘환급’이라는 말에 마음이 쏠렸다. 아니 어떻게 내가 수술하고 입 퇴원한 날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한 치의 의심을 심을 사이도 없이 공단 직원이라는 사람의 말을 믿었다. 회복은 잘하고 있냐고 상냥하게 묻고는 자주 사용하는 통장을 들고 은행에 가서 환급금액을 확인하라고 했다. 환급까지 해 준다는 배려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 말을 빌리면 그날 은행으로 뛰어가던 내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뛰는 것이 아니라 거의 날아가더란다. 은행에 도착하자 다시 전화가 왔다. 현..
2021 좋은수필 베스트에세이 10선 ‘미용실에 오면서 책을 깜빡하다니.’ 긴 시간 어쩔까 걱정하는데, 담당 미용사가 넌지시 책을 대여섯 권 건냈다. 센스에 감탄하며 책을 고르는데 《생명진화의 숨은 고리기생寄生》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었다. 생명진화의 숨은 고리라니, 이런 건 어느 교과서에서도 배운 적이 없잖아! 생명은 환경에 맞게 진화한 거라고 배웠는데 기생이 그 고리라니! 듬성듬성 자리 잡은 궁금증을 꿰어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기생충은 ‘나쁘다’ 말고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 없었다. 훑으며 빠르게 읽는데, 초반부터 나의 상식을 깼다. 기생충의 존재가 언제나 다른 생물체들에게 해를 끼쳐온 것만은 아니다. 이는 마치 헤어진 연인의 감정에도 좋고 싫음이 뒤섞여 있고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의 복잡한 ..
‘허블의 후계자’ 제임스웹…우주망원경 성탄절 교대식 중앙일보 입력 2021.12.24 00:02 업데이트 2021.12.24 12:59 / 최준호 기자, 문희철 기자 2021년 크리스마스에 새로운 우주 역사가 시작한다. 허블우주망원경(HST)의 대를 이을 차세대 제임스웹우주망원경(JWST)이 25일 오후 9시20분(한국시간) 남미 프랑스령 기아나의 쿠루 우주기지에서 아리안-5 로켓에 실려 발사된다. 과학자들은 ‘허블이 모든 교과서를 다시 쓴 것처럼 제임스웹 역시 그 교과서를 다시 쓰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31년 활약 허블우주망원경 거대 블랙홀 관측 성공…137억년 우주 나이 밝혀 ‘100억 광년 이상의 과거를 내다볼 수 있는 획기적인 망원경으로 천문학은 혁명의 시대를 맞게 된다.’ ‘갈릴레오의 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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