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룽지를 만들고 있다.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는데 오늘따라 간도 물도 맞지 않아서 짜고 텁텁했다. 불현듯 눌은밥이 생각났다. 눌은밥은 아주 오래된 부엌과 가마솥, 여인과 아이가 있는 정경 속에서 고소한 향기와 함께 떠올랐다. 그것은 아득해서 너무나 아득해서 삼국시대나 조선시대의 흐릿한 빛깔을 띠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궁이의 불을 낮추어 밥에 뜸을 들기를 기다린다. 여인은 나무주걱으로 식구들의 밥을 펐다. 사랑방으로 건넌방으로 밥상이 들어가면, 솥바닥에 눌어붙은 밥에 물을 둘러서 숭늉을 만든다. 뜨끈뜨끈한 숭늉을 떠낸 후에 솥에 남은 눌은밥을 사발에 퍼서 묵은 김치와 소반에 올린다. “엄마 나 눌은밥!” 아이는 콧등에 땀을 송알송알 맺으면서 야무지게 먹는다. 그 맛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나이든 여인이 ..
장경린 시인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문예중앙》, 1990년 《현대시세계》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넋이야 있고 없고」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 『토종닭 연구소』 『간접 프리킥』이 있다. 시와 시학 젋은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가족 / 장경린 물고기들이 돌 속에 박혀 놀고 있다/ 물처럼 부드러워지는 돌// 나는 그곳에서 추방되었다/ 내가 그곳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곳은 파괴되지 않고/ 완만하게 잘 돌아갈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추방된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잘된 일이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를 지나/ 비바람에 씻겨/ 뒹구는 돌//..
칼맛을 보더니 더 독해진 걸까. 날 선 칼을 튕기며 길을 내주지 않는 단호박. 남반구의 강렬한 햇빛이 키운 완강한 근육을 진작부터 알아봤지만 이리 돌 같을 줄이야. 칼의 길을 더 이상 용납 않는 호박과의 씨름이 낭패스러웠다. 겉가죽이 검푸른 단 호박 한 덩이를 샀다. 작은 크기에 비해 묵직한 뉴질랜드산 호박이다. 깨끗한 공기와 끝없이 푸른 들판을 머금은 환경은 직접 보기도 했지만 숨긴 속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먼 길을 돌았어도 상처 하나 없이 암팡지게 내려앉은 모습이 유장하기까지 하다. 말쑥하게 목욕시키고 식초 단장까지 마친 후 자르려고 칼을 넣었다. 처음부터 이가 약한 세라믹 칼을 들고 설친 게 실수였다. 칼끝을 날리고서야 겨우 빼내고 무쇠 칼로 바꾸었다. 쇠 칼날을 물고도 완강하게 버티는 호..
몸이 지쳐 힘들 때 뜨거운 죽이나 국물을 휘휘 훌훌 떠먹다 보면 힘이 솟는다. 기운을 북돋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도구가 숟가락이다.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노숙자든, 연예인이 든, 기업 총수든, 아니면 최고위 권력자는 신분과 직업에 관련 없이 밥을 먹을 때는 누구나 숟가락을 사용한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 금수저나 은수저뿐 아니라 놋수저도 찾기 힘들다. 보통 우리네 밥상에 오르는 것은 스테인리스 숟가락이다. 최근에는 수저에 계급론이 불거져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 금수저들이 갑질을 하는 오만함을 접할 수 있고 금수저나 은수저로 태어나지 못 한 흙수저들의 가슴 시린 애환도 종종 등장한다. 숟가락은 흥겨울 때는 밥상을 두드리는 타악기가 된다. 작거나 큰 밥상에 둘러앉아 혹은 선술집에서 막..
이른 새벽, 내곡동 동해고속도로 교각 아래서 같은 곳을 맴돌았다. 신복사 터를 알리는 안내 표지가 있었으나 도로와 야산을 두루뭉술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럴 땐 큰길을 표시하는 거라고 알았던 터라, 믿는 도끼에 발등 제대로 찍힌 격이었다. 간간이 오가는 지역 사람조차 절터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으니 난감했다. 그냥 포기 할까 망설이다 조금만 더 고생해 보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위성 지도를 열어 대략의 위치를 파악하니 내곡동 소방서 근처 안골이라는 곳이었다. 내곡동의 ‘내곡內谷’ 한자를 살펴보니 안골과 맞닿는다. 소방서 뒤 야산으로 향했다. 초입이 워낙 허름해, 이런 곳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있기나 할까 하는 의심이 뒤따랐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큼 폭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왼..
황인숙 시인 1958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동서문학상, 김수영문학상, 형평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리스본行 야간열차』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등이 있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 황인숙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 황인숙 꽃 몸살..
나는 평생 책과 함께했다. 40여 년의 교직 생활과 글쓰기로 행복을 쌓으면서 책은 내 삶의 필연적인 동반자가 되었다. 그런 책을 지난해부터 가까이하기가 불편해졌다. 안경을 바꾸어 껴도 별 차이가 없었고, TV 화면의 자막 글씨마저 볼 수 없었다. 안경원에 가서 점검하니 안경 도수 조절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안과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했다. 왼쪽 눈을 과거에 다친 적이 있는지 확인하면서 그 눈이 유달리 백내장이 매우 심하니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수술 날짜를 잡았다. 담당 의사가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과거에 왼쪽 눈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느냐고 다시 확인하여 없다고 했는데, 있었을 것이라고 재차 물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상처를 입고 저절로 나았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을 하..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진눈깨비가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흩날리는가 싶더니 비로 바뀐다. 비가 그치면 따스한 봄이 온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뜬다. 바람과는 달리 기상청 예보는 강추위가 몰아친다고 한다. 추워 봐야 하루 이틀이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산 너머에서는 따사로운 햇살이 동그마니 피어오른다. 나만 그렇지는 않으리라, 1월을 보내고 2월 달력을 넘기면서 이제 봄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실제로 몸에 와 닿는 체감은 여전히 엄동설한이다. 영하의 날씨에 얼굴에 부딪히는 찬바람은 볼살을 따갑게 하고 손은 주머니 속으로 자꾸만 파고든다. 달력 한 장 넘겼다고 봄이 왔다며 두꺼운 외투를 벗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여남은 살 때이었다. 그땐 어찌 그리도 추었든지, 눈이 오기 시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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