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는 유화, 진실, 신앙을 나타내는 심원한 철학적 고찰을 의미 하는 청색을 바탕으로 한다. 산에 우거진 나무의 푸른빛인 듯, 연잎의 푸른빛인 듯, 또는 얼음의 푸른빛인 듯하면서도 단순한 푸른빛이 아닌 청자靑磁. 푸른 듯하면서도 맑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지닌 신비의 비색秘色, 그 우아하고 부드러운 자태와 갖가지 독특하고 다양한 기형器形과 문양, 그러면서도 빛깔이나 무늬, 형태가 너무나 아름답고 귀족스러워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위엄과 냉엄함마저 풍기는 예술품, 그 정적 속에 은은히 풍겨 나오는 불교의 종교적 성스러움과 신품神品. 이것이 바로 중국과 우리나라 등지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귀한 예술품 청자의 모습이다. 특히 고려청자의 빛깔은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고려청자의 기형..
함기석 시인 1966년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 동시집 『숫자벌레』 『아무래도 수상해』, 청소년 시집 『수능예언문제집』, 동화집 『상상력 학교』 『야호 수학이 좋아졌다』 『코도둑 비밀탐험대』 『황금비 수학동화』 『크로노스 수학탐험대』 등을 출간했다. 눈높이아동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애지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올해의 좋은시상, 고양 행주문학상, 이상시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제니 시인 1972년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페루〉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편운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했다. 텍스트 실험집단 루 동인. 시집으로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있지도 않은 문장들은 아름답고》 등이 있다. 페루 /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달빛이 명백했던 밤이다. 부푼 달이 밤새 허공을 휘저었다. 잠을뒤척이다 홀린 듯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의 길은 어지러워서 매번 처음인 듯 낯설었다.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최첨단의 정확한 신문물이라 해도, 뒤죽박죽인 거리에서 전후좌우 혼란해지는 판단까지 막을 수는 없없다. 무조건 용기 있게 ‘고go’를 외치던 자만마저 숙지게 했다. 순간의 판단은 수많은 오류와 섞이기 마련이어서, 매번 목적지를 지나치거나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곳이 산간이든 오지든, 도심 한복판이든 아무리 반복해도 자라지 않는 길눈은, 생의 바깥에서 건너온 매우 낯선 어제이거나 그제 같다. 동래에서 구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다 잠시 멈췄다. 산 아래 펼쳐진 부산의 새벽은 깊다. 이 고개를 부산 사람들은 ‘만덕재’ 또는 ‘만등재’라 부른..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슬픈 시를 함께 읽을 때,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과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 우리를 그렇게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세월호 사건'이 망각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볼 때,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눈물이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눈물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처럼 쉽게 소멸한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진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눈물에 의해서이다. 눈물이 흐른다는 것은 몸속에서 피가 생동하고 있고 이 세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눈물이 없다면 어찌 봄날에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바라보고 감동할 수 있으며, 겨울나무에 매달린 채 떨고 있는 마지막 잎새의 시린 마음을 아파할 수 있을 것인가..
잎이 꽃으로 피는 계절이다. 산과 들에 눈부시도록 황홀한 붉고 노란 꽃이 피어 또 다른 봄을 맞고 있다. 나무도 풀도 가로수에도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단풍꽃을 피워놓으셨는지, 신비로운 자연의 변화를 보니 새삼 성스런 마음이 일어난다. 뿐이랴,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면 세상 부러울 것 없이 마음도 평화롭고 파티복을 갈아입듯 알록달록 단풍으로 치장한 나무들의 춤사위를 보면 화려한 공연을 보는 듯 가슴이 설렌다. 추석 연휴, 아이들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가고 나니 집 안 가득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비로소 내 본연의 삶이 되돌아온 것 같다. 혼자 살아온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홀로 있으니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해진다.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어우렁더우렁 복닥거리고 사는 것도 이제는 점점 낯설어진다. 나들이하기에..
“어머! 귀여워라.” 아기청개구리 한 마리가 베란다 싱크대 문에 붙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물갈퀴처럼 생긴 작은 손끝에 심벌즈를 붙여놓은 듯 앙증맞다. 동생이 주고 간 야채 봉지 속에 이 녀석이 숨어 있을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몇 시간을 쫄쫄 굶었을 텐데 당장 허기를 채워줄 먹이가 없다. 우선 마른 몸이라도 적시도록 세숫대야에 물을 붓고 녀석을 넣었다. 청개구리는 세숫대야에서 유유히 헤엄을 친다. 집 옆에 있는 욱수천에라도 보내야 하는데 산더미 같은 고구마 순이 내 발목을 잡는다. 휴일이라 오늘 고구마 순 까는 일을 다 끝내야 할 텐데 마음은 온통 청개구리에게 가 있다. 어린 딸을 옆에 두고 일할 때처럼 마음이 바쁘다. 고구마 순 까는 데는 나만의 비법이 있으니 이 정도쯤이야 문제없다. 끓는 물에..
청송 주산지 아래 펜션으로 6남매가 모여들었다. 개골창 나무는 살갗이 터져 잎과 꽃을 피워냈지만, 느지막이 내린 사월 봄눈이 허옇다. 그리 잘 나지도 못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자식에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다 모이니 당신 표정 안온하다. 뜨신 방에 등 맞대고 ‘깔깔 흐흐’ 수런수런 밤 길다. 창으로 오리나무 어리고 이슥도록 호랑지빠귀 울음 그칠 줄 모르는 저녁. 아침이 되자 광산김씨 김채용 여사의 팔순잔치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수륙진미를 벌여 놓은 진연 상은 아니지만, 바글바글 끓는 미역국에 당신 좋아하는 음식들로 상다리 휘어진다. 꽃바구니, 돈바구니가 오르고 손자 손녀들이 내미는 선물 증정식에 괜스레 허리에 두른 복대를 풀었다 붙였다 하는 채용 여사. 명색이 글쟁이랍시고 둘째 딸인 내가 편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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