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사진 하나가 카톡에 올라왔다. 앙상한 고춧대가 어설프게 얹혀 있는 낡은 지게였다. 수확이 끝난 황량한 밭 가운데 목발을 내려놓고 가늘고 긴 지겟작대기에 몸을 의지한 채 홀로 서 있다. 주인을 기다리는 사진 속의 지게가 유년 시절을 불러온다. 입대를 앞둔 작은형님이 말했다. 내일은 도시락을 준비해 나무하러 간다고. 동생들만 남겨두고 가려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매사에 욕심을 냈다. 토담이 있던 자리에는 시멘트 불록으로 담장을 쌓고 비가 많이 와도 문제없도록 장독대도 손질했다. 매년 방학만 되면 가래톳이 생기고 발바닥에 물집이 생길 정도로 산을 오르내렸지만, 점심을 준비해간 적은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라 궁금한 점이 많아도 형님의 결정을 그냥 따랐다. 그날은 밤새 바람이 매섭게 불었..
팬미팅 입장표 예매가 시작되니 희비의 쌍곡선에 불이 붙었다. 성공한 사람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 라며 희희낙락이다. 실패한 사람은 망연자실하여 티켓팅이 아니라 피켓팅이라며 풀썩 주저앉는다. 표를 구해 볼 엄두가 안 난다며 남편이 가족 채팅방에 메시지를 올린다. ‘어느 집 자식은 노부모를 위해 불로초도 구해준다더라. 입장권 두 장만 구해내라. 엄마 등살에 목숨이 위태하다’라고 하소연하니 아들이 나선다. 마산역을 출발해 서울 강서구 아레나홀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니 보라색으로 온몸을 치장한 아리스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는다. 작은 가게는 잔치에 초대된 식구들 웃음으로 꽉 찬다. 내가 푹 빠진 팬카페 이름은 트바로티, 가수 K는 별님, 팬덤명은 아리스다. 서로 간에는 식구라 칭하며 응원봉 이름은 그대봉이다...
조인호 시인 1981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방독면』, 『홍대 앞 금요일』이 있다. 나의 투쟁 ㅡ컨베이어벨트 / 조인호 아버지는 정말 유태인이었나// 독일 나치당원이 유태인에게 채운 표지처럼/ 한쪽 팔에 완장을 차고서야 알았다/ 장례식장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같다는 것을,// 새벽녘 장례식장 밖 세상의 모든 공장들이 전자레인지 불꽃만큼 소리 소문 없이 뜨거워지네 삼교대 돌아가며 야근하는 공원들의 어깨가 롤러만큼 자꾸만 둥글어지네 검은 밤이 컨베이어벨트같이 흐르네 화장터의 굴뚝은 점령당한 파리의 에펠탑보다 높았을까 한 삽의 석탄처럼 불길 속에 아버지를 던져넣는 가혹한 노..
길은 길어서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센병 시인 한하운의 ‘전라도길’에 나오는 길을 떠올리면 너무나 길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잘름거리며 가는 길. 하룻길이 긴 날은 욕망이 분출하던 서른 무렵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한하운의 황톳길을 걷는다. 이드와 슈퍼에고의 충돌로 흔들리는 자아가 뙤약볕 붉은 길에서 헤맨다. 그런 꿈을 꾸고 나면 길이 더욱 길게만 느껴진다. 여행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가는 길, 옛날 한성에서 삼남으로 이어지던 기나긴 길에 천안삼거리가 있다. 천안삼거리를 지나는 그 길은 너무나 멀어서 막걸리에 국밥까지 준비된 주막이 있었다. 주막 옆으로는 우거진 능수버들이 그늘을 만들어 ..
운동장 한쪽에 일면식도 없는 두 사나이가 마주 섰다. 거리를 질주하면서 땀 흘리고 고통을 받아들일 각오가 서린 표정이다. 지역적으로 북쪽인 강원도와 남쪽 제주를 대표한다. 마라톤이라는 매개체가 L과의 만남을 이어 줬다. 그가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제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두 사람은 공직에 있으면서 앞만 보며 달렸다. 오십 고개를 넘고 보니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래서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시작한 운동이 마라톤이었다. 나이는 나 보다 두 살 위다. 2003년, 한참 마라톤이 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는 시기였다. L은 강원도청 마라톤 동호회 ‘강마회’ 회장을 맡아 조직 활성화에 정성을 쏟고 있다. 나 또한 제주도청 마라톤 동호회 ‘도르미’를 그해 창단하여 삼 년간 회원 확보와 운영..
조정인 시인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 얼마예요』, 『장미의 내용』,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과 동시집 『새가 되고 싶은 양파』 등을 썼다.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 제14회 지리산문학상, 제1회 구지가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웨하스를 먹는 시간』으로 제9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을 받았다. 사과 얼마예요 / 조정인 사과는 사실 전적으로 서쪽입니다 사과 속에 화르르 넘어가는 석양, 석양에 물든 맛있는 책장들 산산이 부서지는 새 떼 산소통이 넘어지고 쏟아지는 바람 호루라기 소리 길게, 길게 풀리는 붕대 그리고 구토, 촛불이 타오르는 유리창 당신의 우는 얼굴이 엎질러집니다 시럽이 흐르는 접시들은 누가 난장으로 던집니까 안..
웬만한 부식 가게마다 있는, 콩나물은 내가 자주 찾는 찬거리 중에 하나다. 검은 보자기를 덮어 쓴 콩나물 동이가 옛 친구처럼 반갑다. 아주머니가 천을 들치면 잠자던 콩나물이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가지런하게 선 모습이 수줍은 소녀 같다. 연둣빛 고개는 다소곳이 숙이고 뽀얀 목덜미에 상큼한 풋내를 머금었다. 하얀 다리가 반들반들 예쁘다. 매끈하게 잘 컸다. 마트에 가면 비닐봉지에 담긴 콩나물을 골라 살 수 있지만, 시루에서 갓 뽑아 담는 콩나물을 나는 자주 찾는다. 부식 집 아주머니의 손이 큰지, 아니면 단골이라 덤을 주어서인지 항상 넉넉할 정도로 담아준다. 콩나물의 아싹한 식감과 고소한 맛은 비빔밥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 중 하나다. 다른 나물과 구색을 갖출 때 콩나물이 제격이지만, 서민들의 밥반찬뿐 아..
둘째 손자 백일이 추석과 며칠을 두고 맞물려 들어있다. 추석에 내려오는 참에 백일을 우리 집에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며느리에게 제안을 했다. 번거롭게 서로 오고 가는 불편함도 줄이고, 할머니가 백일상을 차려준다고 하니 좋다고 한다. 손자와는 태어나서 한 번 보고는 두 번째 상봉이다. 보내온 사진으로는 자주 보았지만 직접 안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건강한 손자를 출산하고 백일 동안 키워낸 며느리에게도 고생했다는 의미를 담아 축하해주고 싶기도 하다. 내려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백일상차림 음식을 생각한다. 예로부터 백일을 맞이한 아기는 남아男兒와 여아女兒의 구분이 없이 무사히 자란 것을 대견하게 여기며 잔치를 벌여 이를 축하해주던 것이 우리의 풍습이다. 그 유래는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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