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형 시인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산대 대학원 국문과를 나왔다. 2013년 《애지》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흑백 한 문장』을 썼다. 제17회 김달진 창원문학상 수상. 주걱 / 박은형 개망초 흰 머릿수건 사이 여름 오후가 수북한/ 그 집은 가득 비어있다/ 인기척에 반갑게 흘러내리는 적막의 주름/ 컴컴한 부엌으로 달려간 빛이/ 삐걱, 지장을 놓으며/ 눈썹처럼 엎드린 먼지를 깨운다// 밥상을 마주했던 날들을 배웅한 징표일까/ 남은 것들로는 그림자도 세울 수 없는 회벽/ 그을음으로 본을 뜬 그늘 주걱 하나가 거기,/ 테 없는 액자처럼 걸려 있다// 무쇠솥이며 부엌 바닥의 벙어리 주발들/ 눈이 침침한 채 아직 남은 밥 냄새, 만지작거린다/ 누군가와 마주앉아 먹던 모든 첫 밥에는/ 허밍처럼 수줍고 고슬한..
* 전학 어제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하늘색 원피스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책가방을 메고 대문을 나서자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앉아있던 참새들이 포르르 날았다.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을 마을 어귀에서 만났다. 큰길에서 모퉁이로 접어들어 좁은 논둑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잘대며 걸었다. 학교가 파하면 동무들과 냇가에서 붕어를 잡기로 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가방을 메고 나오라 했다. 복도에는 흰 반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아버지가 서 계셨다. 학교에 오시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평소 같지 않게 나를 보고 웃지도 않으시고 몸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따라간 곳은 교장실이었다. 기름을 발라 뒤로 빗어 올린 머리 때문에 이마가 유난..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소마세월 탓인가 착잡한 마음은 가랑잎처럼 바삭하다. 마음속 갈증을 풀어 줄 청량제가 필요했다.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서다 희한한 일을 겪는다. 묘한 기시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편도 2차로에서 내 차는 우회전하려는 참이었다. 1차로에는 직진·좌회전 차량이 줄을 섰다. 1차로 맨 앞에서 대기 중인 차량의 뒷자리 번호 두 개만 비스듬히 보인다. ‘○○53’이다. 문득 앞자리 두 개 숫자는 ‘68’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량번호는 ‘6853이다.’라고 혼자만의 최면을 건다. 아내에게 그 상황을 말하려는 순간 신호가 바뀌고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만치 앞서가는 그 차량의 번호가 내 생각 대로였다. 착시가 아니었다. 내 안에 어떤 영적인 존재가 있는 건지, 깜짝 놀랐다. 흰..
윤진화 시인 1974년 전라남도 나주시 명하쪽빛마을에서 태어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했다. 200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의 야생소녀』, 『모두의 산책』이 있다. 詩川 동인. 손금을 풀다 / 윤진화 당신이 이생에서 지금껏 연주한 가락이 들리거든요/ 손금도 악기 같아서/ 대금, 중금, 소금처럼 가로 불지요/ 당신의 비가(悲歌)는 끝이 없군요/ 휘몰아치는 장단이 꽤 오래됐어요/ 협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쉴 곳이 없어요/ 바람이 쉴 곳이 없으니 푸른 나뭇잎이 흔들리지 않아요/ 나뭇잎이 신명에 겨워야 휘파람새가 몰려오고, 사람이 와요/ 당신에게선 사람이 보이지 않아요, 죄다 죽은 영(靈)이..
실금이 가 있다. 들었다 놓을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소리가 난다. 귀에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어디선가 자주 들어 본 소리다. 자배기를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테두리에 감겨있는 철사가 녹슨 걸 보면 금이 간지도 오래되었나 보다. 사연 있는 이 장독대에 나이 먹지 않은 것은 없다. 큰 독, 작은 독, 멸치 젓국 냄새가 배어 있는 독과 소래기, 자배기, 구석에 숨겨둔 약탕관까지 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나이를 먹었을 게다. 간장 수십 독은 퍼냈음직한 아름드리 장독에서는 여전히 진한 짠내가 난다. 대가족 둘러앉은 밥상 냄새가 거기에 있다. 도시로, 외국으로 돌다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외가 가까운 동네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남편은 어릴 때 방학이면 외가에 와서 지낼 때가 많아서 외가에 대한 추억이 소복..
오성인 시인 1987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푸른 눈의 목격자』가 있다. 2018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았다. 제2회 나주 문학상 수상, 못다 끓인 라면* / 오성인 오늘은 동생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일 겁니다 봉지 안 마른 면발 같은 동생의 길은 꼬이고 굳어져 있어요 아무도 걷지 않는 텅 빈 길엔 아사(餓死)한 바람의 뼈들이 갈아져 비명처럼 흩날립니다 시간의 체온에 닿아본 적 없는 동생은 더 이상 빛과의 추억을 간직하지 못하는 수명 다한 싸늘한 알전구처럼 차갑습니다 손짓을 오해한 산새들이 놀라 흐드득 달아나고 짓궂은 산짐승들이 우우우우 어둠을 타고 내려와 길목을 막고는 여행을 떠나는 언어들을 위협..
무작정 집을 나섰다. 마스크만 쓰고,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니 체한 듯 답답했던 명치끝이 조금은 시원하다. 전망대에 털썩 주저앉아 내려다본 풍경은 내 유년 시절을 품어주었듯이 따뜻하다. 그리움이 출렁이며 춘풍에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린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바람은 부드럽게 내 감성을 살찌운다. 물 냄새가 가볍게 코끝을 간질이고 두 눈을 감는다. 호수를 내려다본다. 만수(滿水) 위로 수상가옥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전에 없던 좌대가 낚시꾼을 기다리며, 어릴 적 내 놀던 곳을 가늠해 본다. 아슴아슴한 기억이 저쯤이라고 일러준다. 맞아 저쯤에 우리 집이 있었지, 살짝 들어간 산허리에는 다랑논이 있었고, 그 위로 밭이 있었어, 밭가의 너구리굴도 무서웠어, 그러나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도 걱정..
해맑은 날씨에 눈이 부시다. 봄물이 번져가는 벚나무 둥지에 꽃망울이 브로치처럼 앙증맞다. 간절기 이불을 빨래하고 의류 건조기 안에 넣으려다 꺼낸다. 이불을 베란다 창틀에 툭 걸쳐놓고 하늘을 바라보니 나비 구름이 흘러가며 유혹한다. ‘이불은 햇살 좋은 날, 마당 어귀 담에 널어서 말리는 게 최고야.’ 하는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아득한 날, 나의 요람은 헌 이불이었다. 어머니는 푹신한 이불을 마주하면 “네가 태어나던 순간이 떠오른다.”라고 하며 애잔한 눈빛이다. 할머니는 태아의 탯줄을 자르고 이불로 핏덩이를 감싸서 밀쳐 두었다. 아버지는 외동아들인데 내리 딸이 태어나 푸대접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하는 서운함이 웅크리고 있다. 하지만 파란만장한 엄마의 일생을 들춰보면 가슴 먹먹한 일들이 스르르 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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