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억 오천만 년 전, 세상은 일테면 장님들의 나라였다. 캄브리아 대폭발로 진화의 포문이 열리기 전까지, 느리고 평화로웠던 저 식물적 시대는 눈의 탄생이라는 지구적 사건으로 시나브로 종결되어 버린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빛을 이용해 시각을 가동하기 시작한 동물들은 생명의 문법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조용했던 행성이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포식과 피식의 격전지가 되어갔다. 먹히지 않기 위해 외피를 강화하거나 지느러미를 발달시키고, 사냥을 위해 힘센 앞발과 송곳니를 장착하는 등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공격과 방어, 양수겸장의 초병으로서 눈의 역할이 지대해졌다. 한번 켜진 빛 스위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눈이 다섯 개나 달린 녀석도 생겨났다. 캄브리아 중기에 살던 오파..
원문과 번역문 첫 번째 첫닭 울고 둘째 닭 울더니 작은 별, 큰 별 떨어지는데 문을 들락거리며 조금씩 행인은 채비를 하네. 其一 一鷄二鷄鳴 일계이계명 小星大星落 소성대성락 出門復入門 출문부입문 稍稍行人作 초초행인작 두 번째 나그네 새벽 틈타 떠나렸더니 주인은 안된다며 보내질 않네. 채찍 쥐고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니 닭만 괜스레 번거롭게 했구나! 其二 客子乘曉行 객자승효행 主人不能遣 주인불능견 持鞭謝主人 지편사주인 多愧煩鷄犬 다괴번계견 - 이병연(李秉淵, 1671~1751), 『사천시초(槎川詩抄)』 권상 「일찌감치 떠나려다가(早發)」 해설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자(字)가 일원(一源)이며 사천(槎川)이라는 호를 썼습니다. 사천 이병연은 1696년 겨울, ..
정선우 시인 부산 출생. 2015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모두의 모과들』 정선우 / 정선우 삐딱하게 파이프를 물고 있는 시선과 마주친 후/ 거울을 열고 조심스레 진입해요/ 귀를 만지며 나직이 이름을 부릅니다// 거울을 뒤집어도 울지 않을 거예요/ 믿음은 언젠가 거울처럼 깨지니까요/ 습관적인 김 서림은 당신이 있다는/ 확증// 얼음 속의 표정/ 표정 속의 얼음// 얼굴을 파묻으면 펼쳐진 공간/ 낡은 의자가 보여요 버리지 못한/ 고독을 닮았어요/ 이해해요 우리는 아마추어가 아니잖아요// 피부가 빛나고 목이 긴 여인은 믿을 게 못돼요/ 제비처럼 날아가버린 제비다방/ 종로 1가 33번지 붐비는 사람들/ 두꺼운 상황을 처리 하는 야윈 손가락들// 바람의 통로를 알고 있는/ 나무들은 팔을 움직여 무언갈 ..
임해음林海音 선생님이 쓰신 을 읽었습니다. 진이 엄마가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고 선생님께서 답장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이 엄마는 정성을 다해서 싸준 도시락 반찬과 밥이 매번 무말랭이와 푸석한 재래 미쌀로 바뀌어 있었고 하루는 도시락까지 바뀐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벌을 받을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어린 아들의 영양식을 누가 가로채고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개의 달걀부침이든 혹은 닭다리든 남편의 박봉을 알뜰히 저축하여 간신히 마련한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오늘은 진이 눈앞에서 큼직한 쇠고기완자찜을 한 덩이 도시락에 넣어주었다고 하면서 이 일을 밝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진이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가다가 잠시 ..
종로3가역은 가까이 탑골공원이 있어서 그런지 노인들이 많았다. 거기다 바닥과 벽타일이 낡아서 역사의 묵은 냄새까지 느껴졌다. 그 속에서 꼿꼿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고희를 넘긴 내 친구였다. 내 손을 꼭 잡아 인사를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나를 위해 맛집을 찾아놓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택시를 타고 삼청동 공원 근처에 가자고 했다. 옛 추억이 많은 곳 아니냐며. 감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변화가 없었다. 삼십 대에 교육을 받았던 연수원의 담장도 우리가 함께 걸었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점심을 먹고 삼청 공원으로 갔다. 녹음 우거진 산책로가 너무 아름다웠다. 친구는 자신의 집 근처인 숙정문 방향으로 앞서 걸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즉흥시를 써 단체 톡 방에 올리고 주..
나석중 시인 193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2004년 《신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숨소리』, 『나는 그대를 쓰네』, 『촉감』, 『물의 허』, 『풀꽃독경』, 『외로움에게 미안하다』와 전자시집 『추자도 연가』 전자디카시집 『그리움의 거리』 등이 있다. 한국문인협회 김제지부, 한국신문예문학회, 빈터, 석맥회(石脈會), 스토리문학관 회원 테이크아웃 / 나석중 이젠 스릴도 즐기게 되었다/ 뛰어내릴까 말까/ 시작은 먹빛이었으나 지금은 보랏빛으로 익숙해졌다/ 정처 없는 바람을 믿지 않기로 했다/ 구름의 천의 얼굴도 보지 않기로 했다/ 마주 앉은 대화는 언제나 뜬구름만큼 부풀리고/ 다정했던 표정도 스쳐간 바람이었다/ 욕심 없는 생은 언제나 한 발 늦었고/ 환송은 기차를 타고 멀리 떠났다/ 어쩌다 행복의..
산비둘기 피울음 우는 유월 초순, 우리 일행은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와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여 길을 나섰다. 임진왜란부터 고종 시절까지 내시들이 살았다는 청도 운림고택을 찾아 나선 걸음이다. 허나 ‘내시’라는 무거운 단어가 뇌리에 박혀 몸도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역사에 해박한 K선생이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청도의 볼거리를 먼저 둘러보고 가자며 여유롭게 트래킹을 이끌었다. 여린 모가 발을 내리는 무논을 지나고 봇물 지줄 거리는 둑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시조시인 민병도 갤러리를 둘러보고 신지생태공원과 선암서원,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룻밤 묵고 가셨다는 만화정과 선사시대 고인돌까지 둘러 본 뒤 임당리 내시고택에 이르렀다. 먹빛 기와담장에 에워싸인 내시고택을 들어서자 덩실한 한옥 몇 ..
도봉구는 웅장하고 수려한 도봉산이 있어서 도봉구다. 도봉구에는 문화유산이 많이 산재해있다. 그중에서도 초안산과 매봉산은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도봉구민이지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초안산내시묘에 관심이 간 것은, 덕성여자 대학교에서 ‘도봉구민을 위한 박물관 문화강좌’를 들으면서부터이다. 문화강좌는 처음 접하는 강의이다. 몹시 흥미롭고 경이로웠다. 드디어 현장 답사 가는 날이다. 갑자기 가을비답지 않게 많은 비가 쏟아진다. 수강생들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늘은 우리를 기다리는 영혼들의 기도가 있었는지 살랑살랑 불어주는 가을바람이 비구름을 살짝 밀어내고, 말갛고 파아란 가을 하늘을 우리에게 열어 주었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은 가을비를 함초롬히 머금고 곱게 물들어 가고 있다. 마치 외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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