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가장 부러워하며 소망하는 물건은 가방입니다. 남편이 로또에 당첨되었을 때 부인의 반응을 살핀 모 방송국 가상극假想劇에서 확인된 사실입니다. 남자들은 사뭇 다릅니다. 내가 아는 젊은 농부는 트랙터나 경운기 등 온갖 장비들이 즐비하건만 지게차까지 원하는 모양입니다. 소일거리 삼아 논마지기에 불과한 농사를 짓고 사는 내가 승용차에 정신이 팔린 건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친구가 새 차를 뽑았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후진 차로 견딘 보람을 만끽하는 모습이 어른거리자 나도 차를 바꾸고 싶은 욕망이 바짝 쳐들었습니다. 눈독을 들인 새 차는 기본에 몇 가지 옵션을 더한 값만 해도 비쌌습니다. 탁송료, 취득세, 공채, 증지대, 번호판 비용, 등록 수수료와 단기 의무보험료가 덕지덕지 추가될 테니 엎친 데 덮친 격이..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형형색색의 립스틱 광고전단이 가던 걸음을 돌려놓았다. 화장품 가게에 들어서자 곱디고운 색깔의 립스틱이 예쁜 꽃처럼 내 손을 끌어당긴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립스틱 중에 빨간 립스틱을 집어 든다. 금방이라도 톡 하고 동그랗게 방울지어 떨어질 것 같은 맑은 빨간색이다. 손님들이 발라 볼 수 있도록 둔 샘플을 손등에 발라 본다. 색깔이 참 곱다. 덜컥 집어 들고 계산대 앞으로 가니 점원이 선물할 거냐고 묻는다. 망설이다 그렇다고 하니 예쁘게 포장을 해준다. 정말 오랜만에 내가 나에게 선물하는 빨간 립스틱이다. 내 나이 스물이었다.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시작한 사회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용모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어느 날 선배가 여자의 화장은 예의라고 충고를 했다. 더없이..
서점엘 갔다. 신간도서 코너에서 책을 살피는데 제목 하나가 눈길을 끈다. ‘며느리 사표’다. 순간, 오래전에 내가 썼던 ‘맏며느리 사직서’가 번개처럼 스치며 묵은 상처를 건드린다. 이 책의 저자(영주)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대가족 장손과 결혼한 저자는 어느 추석 이틀 전, 시부모에게 ‘며느리 사표’를 내민다. 결혼 23년차 되던 해였다. 여러모로 가부장적이며 외도까지 한 남편에겐 이미 이혼선언을 한 뒤였다. 비난할 일도 칭찬할 일도 아니다. 누구든 타인의 삶을 대신 살 수 없는 한 함부로 재단할 권리는 없으니까. 저자는 신발을 잃어버리거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은 잠재적 무의식의 발현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잃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저자가 택한 건 칼과 등불이었다...
* 삼사십 대로 보이는 남성 10여 명이 한 카페에 모였다. 그곳은 그들이 울기 좋은 곳이다. 그 시간 카페 입구엔 일반손님은 받지 않는다는 팻말이 걸린다. 그들 앞에는 손수건이나 일회용 휴지가 놓여있다. 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영화를 보면서 거리낌 없이 운다. 슬픈 장면이 나오면 훌쩍거리거나 소리 내서 울기도 한다. 평범한 영화동호회원처럼 보이는 이들은 한국판 ‘루이카쓰(淚活)’ 모임 회원들이라 한다. ‘루이카쓰’는 일본에서 시작되었으며 ‘함께 모여 우는 일’을 일컫는다 한다. 일간지에서 읽은 내용이다. 옛 어른들은 ‘남자는 함부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눈물은 나약함의 증거이며 남자는 강인해야 한다는 게 정석이었다. 젠더(gender)의 관점으로 보자면 남성..
# 고프다 며칠을 몸살감기로 꼬박 앓았다. 손발 꼼짝 못하고 죽을 듯이 누워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남편 혼자 밥을 챙겨 먹었다.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 이런저런 음식을 해주거나 사다주었지만, 음식 생각만 해도 입덧을 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보리차로만 연명하기를 며칠, 어느 아침에 내 몸이 ‘배가 고프다’는 신호를 어렴풋이 보내왔다. 고프다. 아, 살아나는 거구나. 식욕은 숭고한 거구나. 그렇다면 형이하학적 욕구나 욕망이란 단어에 보냈던 경멸은 거둬들여야 한다. 정신은 고고한 것이고 육신은 비천한 것이라 여겼던 형이상학적 욕망이야말로 얼마나 어쭙잖고 편협한 오만이었던가. 먹을 것이 없어 ‘고프다’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존엄성도 허물어진다. ‘고프다’엔 생명의 무게가 실려 있다...
여러 채의 초가가 나지막한 산기슭에 소곳이 엎드려 있다. 노랗고 둥근 지붕이 마치 대광주리를 엎어 놓은 듯하다. 포근한 마을이 분지 같아 광주리 터인가 보다. 마음을 안온하게 보듬어 준다. 초가 외벽에는 오래된 크고 작은 대광주리가 오달지게 매달려 있다. 낡은 것도 서러운데 흙바람을 맞는 게 안쓰럽다. 참한 광주리는 초가의 파수꾼일까. 오직 못 하나에 의지하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 와중에 뒤란의 대숲 노래를 듣겠다며 귀를 모으는 여유를 부린다. 차분한 광주리가 내 마음을 붙든다. 대광주리는 재질이 가볍다. 펑퍼짐한 모양과 달리 바닥 올이 촘촘하다. 대나무 숲의 그 푸른 바람 냄새가 솔솔 난다. 섬세함과 대쪽 같은 장인 정신도 올마다 숨 쉰다. 까칠한 대나무를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서 만든 ..
먼 제주도의 하얀 목련꽃이 티브이 속에 만발했다. 섬진강 강변의 낮은 산자락에 샛노란 산수유와 연분홍의 매화가 줄줄이 꽃 피운 것도. 봄을 불러온 꽃들은 그 명성만큼이나 화사했다. 눈부신 자태를 화면 가득 뽐냈다. 부럽기만 하던 그 봄이 며칠 지나자 우리 집 담을 훌쩍 넘어왔다. 봄은 바람타고 남쪽에서 바다 건너, 산 넘어 북쪽으로 릴레이 바통처럼 이어졌다. 어느새 서울, 평양까지 산과 들을 푸른 옷으로 치장했다. 그런데도 우리 집 뜰의 대추나무는 여태껏 아무 기별이 없다. 양옆의 나무보다 야위고 키가 작아 있는 듯 없는 듯 해 안쓰럽다. 어딜 가나 뒷자리에 머물게 되는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대추나무에 막내 여동생도 겹친다. 나와 띠 동갑인 동생은 아기 때 모유가 턱없이 부족했다. 어머니는 ..
어둠의 군주 사우론이 만든 절대 반지는 강력했다. 누구라도 제왕이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졌고 날카로운 눈길로 노리는 자들이 많았다. 반지를 없애려고 했던 프로도마저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기 싫어 괴로워한다. 이십여 년 전에 관람한 영화 ‘반지의 제왕’은 악의 손아귀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한 반지 원정대의 모험을 그린 내용으로 지금까지도 강렬한 인상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 ‘절대’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라는 말로 예외를 둘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을까만 누가 뭐라 하든 깊은 신념만 지니고 있으면 얼마든지 가질 수도 있을 듯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손발이 척척 맞는 독자를 만난 순간 한껏 흐뭇해진다. 무한한 감동을 아낌없이 펼쳐 보이고 때로는 냉정한 비판으로 글심을 더욱 굳건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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