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냄새가 났다. 짭조름한 내음도 났다. 어머니 손을 잡고 마을에 하나뿐인 화실로 처음 그림을 배우러 가는 어린 샤갈과 눈이 마주쳤다. 낯선 거리 풍경이 들어왔다. 세탁부와 굴뚝 청소부가 사는 집을 지나고, 아내가 파는 브랜디를 몰래 마시고 늘 말처럼 '히힝' 거리는 마차 아저씨 집을 지나 샤갈의 집에 닿았다. 그의 아버지가 예언자 엘리야가 올 수 있도록 늘 열어두라던 대문은 열려 있었다. 동생 다비드가 켜는 만돌린 소리 속으로 (no.4)의 나지막한 기도가 섞여들고, 청어 상점에서 인부 일을 마치고 돌아온 (no.1)가 청어의 비린내를 씻어내는 목욕물 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한 빛의 색채를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는 사라졌다. 채색화는 몇 점에 불과했고, 무채색의 삽화들이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걸려 있었다. ..
수필 선생님이 수필 쓰는 이야기를 글감으로 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애당초 좋은 작품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거나 용을 쓴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터, 수필 쓰기에 대한 소회를 그냥 한번 풀어보렵니다. 사십여 년간의 월급쟁이 굴레를 벗고 보니 별안간 시간이 쓰고 남을 만큼 부자가 되어 있더군요. 우울이라는 놈이 친구 하자고 꼬드기기 전에 무언가 할 일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가 수필을 만났습니다. 수필 쓰기를 가르쳐 주는 곳을 찾아보니 더러 있습디다. 누가 참 좋더라 하는 데를 컴퓨터로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마지막 남은 한 자리를 쳐넣었더니 화면이 덜컥 ‘신청 완료’로 기분 좋게 바뀌더라고요. 옛날에는 이런 것을 하려면 직접 가서 종이 신청서에다 빈칸을 성실하게 ..
올 삼월에 도심에 자리한 오래된 개량 한옥 한 채를 빌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ㄱ자 집 안채 건너, 마당 맞은편에 두어 평 남짓한 꽃밭이 있다. 꽃밭의 남쪽은 담벼락에 막혔고, 담 너머 한 뼘 간격도 없이 옆집 건물이 서 있다. 꽃밭에는 어른 가슴팍 높이까지 오는, 허벅지 굵기만 한 가지 세 개가 덩그러니 남아 있는 오동나무가 서 있다. 마치 고층 건물 앞의 어울리지 않는 조각품처럼 볼품없는 모양이야 그렇다 치고, 주인이 바뀐다고 제 살이 무참하게 베어져 나간 오동나무의 처지가 안쓰러워 보였다. 이사한 후, 이 나이 되도록 텃밭 한 번 가꾸어 보지 못한 내가 문우들에게 꽃밭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꺼냈더니 후원자가 줄을 이었다. 초롱꽃을 한 줄 심어주는 이, 꽃 잔디를 심어 놓고 가는 이, 치자꽃과 모..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올해는 좋은 일이 많이 생기려나. 정초부터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고 보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온종일 나를 사로잡는다. 고맙다고 인사라도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 더 고맙고 행복하다. 매일 쏟아지는 어두운 뉴스 속에서 가끔 들려오는 누군가의 선행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커피를 주문하고 값을 치르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들었다. 앞 사람이 내 커피값을 이미 지급했다는 것이다. 나와는 얼굴 한번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이. 앞 사람이 뒷사람의 커피나 음식값을 내주는 일이 있다고 얼핏 들은 적은 있다. 그런데 오늘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얼떨결에 받아 든 특별한 커피 한잔, 그 향이 깊숙하게 파고 든다. 코로나19 팬데..
15억 8,600만 달러! 차를 타고 가다 전광판 광고에 눈이 멈췄다. 역대 당첨금 중에서 가장 크다며 연일 화젯거리인 파워볼의 기세가 놀라웠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나 보다. 숫자에 끌려서 그 복권을 샀다. 미국에서 처음 사보는 것이라 우리는 많이 들떴다. 행운은 뜬금없이 찾아오는 것, 무슨 특별한 꿈은 꾸지 않았지만, 느낌이 좋았다. 가슴은 점점 부풀어 행운이 우리에게 올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머릿속 계좌에는 이미 그 돈이 들어와 있었다. 당첨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남편에게 물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에 사표를 쓰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얼마나 그런 날을 원했으면 마치 주머니에 준비해두었던 사표를 꺼내듯 내뱉나 싶었다. 정말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했다. 그의..
겨울 바다는 고독하다. 몽롱하던 봄의 입김도, 뜨겁게 달구던 여름의 정렬도, 가을의 낭만적 휘파람도 사라졌다. 냉기로 가득 찬 파도만이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 소리는 흐느껴 우는 여인의 소리 같기도 하고 사자의 성난 소리 같기도 하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는 세상 소리를 모두 받아들인 아픔이었다. 검은 바위에서는 강한 마찰음이 이어졌다. 마치 성난 아버지가 내려치는 회초리의 힘과 잘못한 것이 없다고 버티는 당찬 아들의 갈등 같았다. 하늘로 치솟은 물기둥이 하얗게 부서지며 내려앉고 다시 전장을 갖추고 밀려들어 기어이 부서지고야 마는 파도가 온 바다를 멍 들여놓았다. 궤도를 벗어난 허전한 마음이 자리 잡지 못하고 폴폴 날아다녔다. 나의 항구는 어디쯤일까. 표류하는 마음을 잡아줄 항구는 어디일까! ..
빌라 화단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에 밤톨만 한 열매가 열리면 잘 익은 감을 그리곤 한다. 토종이라 씨알이 굵지는 않아도 익으면 단맛이 좋다. 성급하게 따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감이 완전히 붉은색을 될 때까지 기다린다. 감은 이슬을 받고 가을 찬바람을 견뎌야 무르익어 제맛이 난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면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홍시가 생각나 설레곤 했다. 지난가을에는 감나무에도 병충해가 생겨 감을 수확하지 못했다. 감이 익을 무렵 묽은 주황빛이 돌더니 툭 툭 떨어져 버린다. 현관 앞 시멘트 바닥에 물컹하게 밟히는 감으로 성가실 정도다. 까치밥으로 남길 것도 없이 다 떨어졌다. 마른 감꼭지가 앙상한 가지에 까만 별 모양으로 붙어있다. 까맣게 굳은 채로 아쉬운 결실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나무는 헛헛하..
허물어진 담장이 오래된 절을 더욱 쇠락해 보이게 한다. 볕에 바래 윤기를 잃은 기와지붕마저 한쪽이 내려앉아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추녀 아래로 삭풍이 휘돌아 나간다. 풀도 사위고 잎도 다 진, 겨울 동안만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적한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나지막이 엎드린 요사채의 처마 밑에 달려 있던 곶감이 소리 없는 풍경처럼 흔들린다. 기척을 느꼈는지 스님이 장지문을 열고 내다본다. 가끔씩 찾아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마치 색계를 떠나오기라도 한 듯 온통 무채색의 풍경 속에서 오직 곶감의 다홍색만이 두 눈에 가득 찬다. 아마도 절 입구에 있는 커다란 감나무에서 딴 감 들이지 싶다. 족히 두 아름은 되어 보이는 그 감나무는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우리만치 오래된 고목이다. 초파일에는 덩치에 어..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