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집콕'을 하라 한다. 모든 강의가 묶여 거지반 이 년째 두문불출이다. 생애 최초의 긴 휴식 기간이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긴다. 그러다 쉼이 필요하면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돌린다. 별반 시청할 게 없다. 다행히 엣지에선 일천 회를 넘었던 최장수 프로그램인 를 방영하고 있다. 잠시 시신을 화면에 둔다. 고전적 냄새가 나지만 그 풍미만은 여전하다. 양지마을엔 꼬마들이 몇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아버지는 눈을 가리고 숫자를 센다. 아이는 묘지를 가림막 삼아 숨는다. 곁에서 보면 보일락 말락하다. 숨었지만 숨은 게 아니다. 숫자를 센 아버지가 주변을 둘러보며 아이를 찾는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아이는 꼭꼭 숨고, 아버지는 건성으로 아들을 찾는..
코네티컷 윈저 지역의 A사 창고 건축 현장에서 여러 개의 올가미가 발견됐다. 당연히 공사는 중단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사법 절차 없이 흑인들을 목매달았을 때와 같은 형태의 고리형 밧줄이란 이유에서였다. 플로이드 사건과 더불어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아시안 혐오 범죄가 이어지는 요즘, 사안이 예민해서인지 A사 측은 인종차별과 혐오는 절대 용인하지 않겠다며 강한 어조로 입장을 밝혔다. 동네를 걷다가 달콤한 향에 고개를 들었다. 목련이었다. 하얗다 못해 고귀해 보이는 꽃의 얼굴은 혹여 고개가 땅으로 떨어질까 싶어 하늘을 향해 곧게 쳐올려져 있었다. 미카도 실크를 한장 한장 겹쳐 놓은 듯 꽃잎은 빛을 받아 우아한 광택을 뿜어냈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리도 향기로운데 목련을 보고 있는 내 마음 ..
오랜 숙제처럼 마음에 품고 있었다. 무심히 잊고 살다 어떤 기억의 끝에서 되살아날 때면 조급증이 일기도 했다. 그는 늘 거기 있으니 언제든 가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우연히 일어난 한 생각도 만삭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문득, 출산의 기미처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충동이 찾아왔다. ‘배다리 헌책방거리’는 한산했다. 그늘 한 점 없이 땡볕만 자글거렸다. 도로는 근래 포장된 듯 산뜻했으나 길을 따라 줄지어 선 대여섯 곳의 서점들은 오래된 건물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60년대 거리가 형성될 당시 헌책방이 40여 군데나 있었다는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찾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성냥공장이며 양조장 등 한 시절을 구가하던 일대 기간산업들은 진작 사라지고 박물관이나 허..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을 와 열일곱에 나를 낳았다. 오빠와 남동생이 하나, 네 명의 딸 중 셋째 딸이었다. 언니 결혼 함지기로 왔던 신랑 친구인 아버지는 첫눈에 어머니를 마음에 두었다. 부모님을 졸라 매파를 넣어 부랴부랴 혼인을 했다. 키가 크고 숙성하여 꽉 찬 나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경상도 합천 산골에서 일찍 결혼한 할아버지는 학식으로나 그의 야망을 시골 땅에 못 박지 못하고 부모님, 처자식을 등지고 대처로 향하였다. 아들 둘을 낳은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형님은 일본으로 가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새 할머니와 함께였다. 내가 본 할머니는 외출할 때는 화려한 양산을 쓰고 뾰족한 구두를 신는 신여성이었다. 일제 강점기였으니 상당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여느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매서..
돼지 한 마리가 내게로 왔다. 아들이 직장에서 근속 10주년으로 받았다며 조그마한 순금돼지를 내밀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으로 사표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보낸 세월의 보상이다. 그것을 알기에 대견하기도 하고 마음이 짠했다. 그런데 그걸 기꺼이 나에게 주겠단다. 반짝반짝 빛나는 돼지를 보자 평소에 관심도 없던 로또가 사고 싶어졌다. 마침 가족과 아산 삽교천에 가기로 했는데, 가는 길에 1등 당첨이 자주 나오는 유명한 로또 판매점이 있다. 혹시 내 행운이 거기에? 길이 밀린다. 로또 명당이라고 소문난 곳이라 주차하려는 많은 차량들로 인해 토요일은 항상 교통이 정체된다. 차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겨우 도착했다. 로또점 밖까지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기..
세상에 저마다의 착각이 없다면 재미있는 일이, 재미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까. 어쩌면 우리의 착각들로 세상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착각을 잘한다. 그 남자의 가출사건과 그 여자가 혼자 착각에 빠진 사연을 가지고 소설의 플롯을 짜면 멋진 작품이 될 것 같다는 착각으로 요 며칠 즐거웠다. 늦은 가을 무렵 뒷집 남자가 사정이 생겨 집을 떠났다. 그 사정이란 게 극히 개인적인 일이라 이웃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후에는 그집 부인이 짐을 챙겨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남자가 우울증이 걸려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부부가 같이 있다는 소식은 그런 중 다행이었다. 태어나서부터 환갑이 넘도록 살던 곳인데 얼마나 아프면 집에를 오지 못할까 다들 걱정이었다. 언젠가 막걸..
부글부글 끓는 국수를 건져낸다. 찬물로 목욕재계한 면발은 매콤새콤한 양념장과 격렬하게 몸을 섞어 비빔국수로 재탄생한다. 송송 썬 오이와 고소한 깨소금이 축하의 꽃가루처럼 뿌려진다. 완숙된 달걀 반쪽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깨소금 위에 앉는다. 특별한 대가 없이 최고 상석을 차지한 미안함보다 음식을 예쁘고 맛있게 완성했다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충분한 음식이지, 훌륭한 말이 아니다.’라는 격언처럼 인간의 삶에서 먹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굶주림에서 벗어나야만 희로애락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 생활의 여유가 생기면서 ‘충분한’ 보다 ‘맛있는’ 먹거리를 원했다. 맛을 돋우는 양념을 획득할 목적으로 유럽에서는 후추로 인한 향료 전쟁이 벌어졌고, 여러 국가에서는 소금을 쟁취하기 위해 많은..
직업 특성상 일주일에 한 번 코로나19 검사를 한다. 오늘도 출근하기 전에 검사하는 날이다. 보건소까지 가려면 마을버스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 출발점이 아파트 단지 앞이고, 마을버스는 1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출발하는 시간 맞추어 나가면 되니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이 몇 분 정도 단축된다. 바쁜 아침 시간에 짧은 순간이나마 여유가 생겨서 좋다. 매번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으니 편하게 간다.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지만 단점이 있기도 하다. 마을버스는 골목골목을 누비며 달린다. 굴곡이 심한 도로 모퉁이마다 곡선을 그린다. 모퉁이를 돌 때 몸 중심이 흐트러지고 아차 하면 넘어질 수도 있다. 오르막 내리막길 위에 정차하는 횟수가 잦다. 운전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이면도로 사정 때문이다. 어느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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