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자루를 짊어진 아버지가 앞에서 뛰고 그 뒤를 바싹 아들도 달린다. 아들의 한 손엔 책가방, 다른 손엔 새끼줄로 동여맨 김치 단지가 들렸다. 기차는 길게 기적을 울리며 산모퉁이를 돌아오고, 차를 타러 달려가는 두 마음은 뛰는 다리보다 급하다. 기적 소리의 가늠만으로도 기차가 곧 아버지와 아들을 앞질러 정거장에 닿아버릴 것 같다. 더 힘껏 뛰어야 한다. 땀이 비 오듯 한다. 초가을 햇볕은 목덜미를 유난히도 따갑게 비추고 숨은 턱에 차오른다. 기차와의 경주다. 차가 역에 닿기 전, 아니 나란히라도 역구내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 아들은 기차를 타고 도청 소재지로 가서 내일 월요일에 학교를 갈 수 있다. 울퉁불퉁 자갈 깔린 신작로, 가물은 땅에서 먼지는 풀썩거리고, 아버지의 땀 밴 고무신 한 짝이 벗겨져 나..
얼마나 많은 혼이 깃들었기에 이천 년을 넘어섰을까. 누군가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옻나무, 수많은 고통과 시행착오를 견디며 나무의 영혼을 담아 인간의 손길로 다시 태어난 칠漆이다. 마음의 고향이라서일까. 전통을 이어가는 유튜브 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색채는 은은하나 가볍지 않고 광택은 있으나 눈부시지 않으며 화려하나 질리지 않는다. 옻의 매력에 푹 빠졌다. 채취 현장을 보러 충북 옥천을 찾았다. 피부에 닿으면 옻이 올라 눈만 빼고 가렸으니 오죽 더울까, 물에 빠졌다 나온 몰골의 40대 칼잡이는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다. 내뱉는 말은 가시 투성이고 눈총은 따가웠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찾아온 연유를 밝혔다. 그제야 생수로 목을 축이더니 잔뜩 세웠던 가시를 눕힌다. 야무지게 움켜잡은 칼이 옻나무 껍..
삶에 지칠 때 시장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그곳에서 퍼덕이는 물오른 생선과 상인들의 힘찬 목소리에서 잃었던 활력을 얻는다. 뿌리째 탄탄한 푸성귀를 고르고 뜨끈한 장터국밥 한 그릇 먹으면 시들했던 삶에도 생기가 돋게 된다. 우리 동네는 바닷가라서 배릿한 해변시장도 있고 오래된 담장을 끼고 사시절 골목시장도 열린다. 틈을 내어 버스라도 타면 역전시장에도 가고 도떼기시장이라 부르는 국제시장도 닿고 구제품이 즐비한 깡통시장까지 구경한다. 해변시장은 갈치와 꽃돔과 꼼장어가 얼음판 위에 버티고, 골목시장에는 아직도 맷돌을 돌려 콩물을 내리며, 명절이면 뻥튀기 기계를 돌려 쌀강정을 만드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어디 그뿐인가. 돼지껍데기가 쥑이는 집도 있고 서울 사람도 알아주는 부산 오뎅집도 반기며 옆에 있는 시숙도 몰..
마음이 스산하고 몸이 오슬오슬 한기라도 들라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순댓국이다. 편안할 때는 무심히 지내다가도 사는 게 팍팍할 때면 불쑥 그리워지는 친정엄마처럼 고단하거나 서글플 때면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평소 식당의 청결이나 분위기를 따지는 편이다. 그런 내가 순댓국집만큼은 삐걱거리는 나무 문짝을 열고 들어가는 허름한 식당을 부러 찾아간다.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앉은뱅이 상에서 먹는 국밥은 한 끼 밥이 아니다. 보약 한 첩이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되살아나고 맥없이 처져 있던 몸에 생기가 도니 말이다. 순댓국을 처음 먹은 건 고등학교 때이다. 등교 시간에 쫓기던 나는 뺑 돌아가야 하는 넓은 길보다 시장 통 사이로 가는 좁은 길..
오랜만에 침이 돈다. 요리 맛의 절반은 추억 맛이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추억이 깃들지 않으면 별로다. 내 고향에서는 간장게장인 '게젓'을 '끼젓'이라 부른다. 끼젓 맛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살아온 인생사에 많은 차이가 있다. 경상도 끼젓 맛은 소태 할배보다 짜다는 것. 그래도 땡겨서 자꾸 먹는 맛이다. 얼마나 짠맛인가 하면 끼 달가지가 열 개인데 집게 달린 달가지 하나면 충분히 밥 한 공기는 먹을 수 있는 그런 맛이다. 지난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녹산 신호리 명호 지역에는 김이 많이 났다. 또 민물장어 치어와 끼를 잡아 생계를 이어갈 정도였다. 특히 녹산 수문껄 밑에는 밤중에 횃불을 켜고 민물장어 치어를 잡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옛날도 지금도 민물장어 치어는 양식이 안 되었다. 오..
부산 갈맷길 1.2구간: 임량-송정-해운대해수욕장-오륙도 이 땅의 동남쪽, 희망의 밝은 아침 태양이 먼저 솟아오르는 곳. 아기자기한 산과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는 바다가 위치해 있고, 그 가운데 우리네 삶이 어우러지는 도시가 있는 곳, 그런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부산 갈맷길을 찾아 나선다. 갈맷길은 갈매기와 길의 합성어다. 부산에서 아름다운 바다와 그 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이름을 붙인 곳이다. 평소 답사 여행을 좋아하는 관계로 인터넷으로 잠시 대략적인 현황을 검색해 보고 배낭에 짐을 꾸려 무작정 길을 나선다. 처음부터 아는 것은 없다. 보고 듣고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처음 시작하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새로운 희망과 기대도 되는 것이다. 서울에서 4시간 반을 달린 고속..
사람들은 옆집에서 음악소리가 나거나 즐겁게 떠 드는 소리가 들리면 항의를 하지만, 싸우는 소리가 날 때는 오히려 조용히 들으며 참아주는 심리가 있다고 한다. 뜻밖이었지만,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상황이라면 배려일 수도 있고 호기심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의 일이다.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뒷베란다 쪽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밖을 보니, 중년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감정섞인 목소리를 주고받더니 드디어 싸움으로 바뀌었다. 옷차림 새로 보아서 중년의 여자는 이제 막집에서 나온 차림이었고, 몇 살쯤 어려 보이는 남자는 다인승 차량 의문을 열어 두고 싸우고 있었다. 꽤 이른 주말 아침이었지 만한, 두 사람씩 구경꾼이 모여들더니, 어디서 나왔나 싶게 금방 열 명은 ..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뚝. 띠띠띠. 또 장난 전화였다. 며칠 동안 계속되는 전화에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당시엔 온 가족이 집에 있는 유선전화 하나로 통화하던 시절인데다가 나는 고등학교 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걸려오는 전화를 모른 체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나는 매번 그 전화를 받았다. 아이들 사이에 장난 전화가 유행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 번호나 눌러서 상대방이 전화를 받으면 말없이 뚝 끊어버리는 것이다. 친구 집에 갔다가 재미있으니 해보라며 친구가 번호를 눌러주는 바람에 나도 장난 전화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는 내내 가슴이 얼마나 뛰던지,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마자 놀라서 끊어버렸다. 친구는 “저쪽에서 말을 하면 그때 끊어야지.”라며 내게 장난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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