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쯤 전이었을까? 오래 이어오는 한 정기모임에서 “아이고, 그 반지 예뻐요. 어디서 샀어요?” 한 선생님이 내 손에 낀 반지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본래 장신구 착용을 좋아하지 않으나 이따금 기분이 내키면 손쉽게 살 수 있는 것을 사서 끼거나 걸고 나가 자랑을 할 때도 있다.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경기전 주차장에서 열리는 프리마켓에서 압화가 든 초록색 반지를 하나 사서 처음 끼고 나간 날, 구순에 가까운 선생님의 간절한 눈빛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드렸다. 처음에는 비슷한 것이 있나 토요일이면 나가 돌아보기도 했지만, 어느 때 인가부터 아예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리고 며칠 전 선생님으로부터 택배 하나를 받았다. 고운 한지함 속에 정겨운 손글씨 편지와 함께 그 옛날 빼 드렸던 반지..
바람은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다. 가고 싶은 곳은 아무 데나 간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비껴가고 언덕진 곳에서는 뛰어넘는다. 바람은 정을 붙일 데가 마땅치 않아서인지 추억을 만들지 않는다. 추억이 없으므로 사진첩을 뒤적일 일도 없다. 어디론가 정처 없이 가야만 하는 인생론과도 흡사하다. 바람은 거리낌이 없는 존재다. 누구의 간섭도 싫어한다. 성인의 말씀을 정신적 지주로 삼지도 않는다. 태생의 역사를 모르는 바람은 일정한 행선지가 없어 기분 내키는 대로 산다. 그들 흐름의 행보는 밤낮이 없지만 자연의 이치대로 흘러간다는 믿음이 있다. 바람은 바람둥이다. 바람난 남정네처럼 아무하고나 몸을 섞는다. 몸과 몸을 섞는 데는 이골이 난 선수들이다. 통제받지 않는 망나니처럼 그렇게 또 몸을 자주 섞어도 주목할 만한 사..
오후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때는 인정받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친구는 오륙 년 전에 소위 '명퇴'를 당하고 그냥 이런저런 봉사 활동을 하며 소일한다고 했다. "아직도 일하라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이제는 어디 가나 무용지물에 퇴물 취급이나.... 봉사 나가는 곳에서도 젊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더라고. 넌 젊은 애들 사이에서 살아서 모를 거야. 난 젊은애들 앞에서 주눅 들어" 허탈하게 말하는 친구에게 나는 대답했다. "얘, 주눅은 무슨 주눅! 죽자 사자 열심히 살았는데 무슨 죄 지었어?" 친구가 간 후 볼일이 있어 백화점에 들렀다가 배가 고파지자 식품 매장에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1층을 가로질러 가는데 얼핏 화장품 진열대에 놓인 거울에 내 얼굴이 비쳤다. 오후가 되..
“언제 예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기다리면 그날이 오긴 올까?” 긴 전화 통화 끝에 노래의 후렴처럼 친구와 매번 나누는 말이다. 아무도 답을 모르는 화두처럼 공허하다. 지난 몇 해 가을 바다를 건너 날아간 제주에서 며칠을 몸 부딪치며 수다 떨던 날들, 바다의 수평선이 아스라이 보이는 찻집에서 마시던 아침나절의 커피 향, 같이 함에 더 무게를 두었던 우리의 시간들을 어찌 잊을까 싶다. ‘이상적인 삶이란 골방과 광장을 오가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이다. 일 년 반전에 시작된 코로나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삶에서 사람들을 점점 멀어지게 했다. 우리들의 광장이란 철학자의 심오한 얘기가 오가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그렇고 그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숨을 쉴 수 ..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인지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실행이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도 잘못 전달이 되거나 오해해서 들으면 배신감이 들 수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어서다. 등산을 떠날 때부터 하늘이 우중충했다. 오늘 목적지는 충남 서천의 월명산이다. 대구에서 부지런히 차량으로 달려도 세 시간 반 이상이 소요되는 곳이다. 산의 높이는 삼 백여 미터에 미치지 못하나, 바닷가에 위치해 고도가 높아 보이고 단아한 산세로 인해 정상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무척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왕복으로 7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거리를 한 번만 쉬고 계속 달려..
물낯이 맑아서 하늘이 앉았다. 바람도 피해 간 우물이 고요하다. 산속에 숨어 있어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우물이다. 얕은 우물은 속이 환히 보여서 편안하다. 주르륵 두레박줄이 손바닥을 타고 내 안의 우물 속으로 미끄러진다. 유물처럼 남아 있는 우물을 두레박이 깨우자 출렁하며 잠을 깬다. 손바닥에 열기가 짧게 스칠 때쯤 텅 하고 두레박이 물에 닿는다. 그 순간 긴장하고 있다가 손을 힘을 주어 기억의 줄 끝을 붙잡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안에서 아찔한 두려움이 훅 끼친다. 어렸을 때 우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서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우물 끝에 설핏 비치는 하늘 조각은 어지럼증을 일으켰다. 큰 정자나무 가지가 뻗은 곳쯤에 앞가르마 반듯하게 타서 쪽을 찐 큰고모가 살았다. 순해 보이지 않는 눈썹..
Ⅰ. 연필이 백지를 앞에 두고 살을 벗는다. 신성한 백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목욕재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죄악과 탐욕으로 물든 몸뚱이 그 자체를 벗어야 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리움을 쓰기 위하여 비장한 마음으로 결국 몸을 벗는다. 아, 관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체처럼 꼼짝없이 누워 지냈던가. 외롭구나. 정말 보고 싶구나. 짓누르는 어둠 밑에서 사향각시처럼 얼마나 자주 무겁게 탄식했던가. 세상으로 나서지 못하고 몸 안에서 맴돌다 결국 살이 되어버린 부질없는 독백과 회한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싱싱한 날것으로 살아나는 생살들, 그래 이제는 가거라. 죽어도 썩지 않는 향기로운 살점들아. 살을 저밀 때마다 신경들이 심하게 경련한다. 비릿한 근육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린다. 떨어져나간 살점들은..
제24회 한국해양문학상 우수상 시퍼런 바다가 쏟아진다. 탱글탱글 터질 것 같은 싱싱한 고등어가 배에서 바로 집으로 왔다. 스티로폼 박스에 얼마나 꾹꾹 눌러 담았는지 박스가 미어터진다. 고등어 사이사이에 신문지 뭉치를 쑤셔 넣듯 쿡쿡 박아 넣은 한치는 또 얼마나 많은지, 쏟아 놓으니 큰 대야에 가득하다. 제매가 오징어 좋아하는 줄을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 제철 만난 한치를 많이도 보냈다. 맙소사, 작은오빠가 바다 한 귀퉁이를 툭 떼어 보낸 것 같다. 막내 오빠는 고등어잡이 선단의 운반선 조리장이다. 오빠가 전하는 고등어와의 사투는 각본 없는 드라마다. 남항 부두에서 고등어잡이 선단은 새벽바다를 빠져나간다. 본선 한 척과 환한 불을 밝히는 등선 두 척과 운반선 세 척이 모여 여섯 척의 배가 선단을 꾸리고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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