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는 방식에도 예절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나, 나에게는 그것이 공연한 부담으로 느껴 질 때가 많다. 여름에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던 옛날 양반의 정신이 나에게는 희박한 편이어서, 옷이라는 것은 몸에 편하도록 입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더운 여름날에는 셔츠 바람으로 다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넥타이라는 것을 생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배짱이 그다지 두둑한 편이 아니어서, 나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관습이라는 것에 얽매여 살고 있다.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과 옷차림이 다르면 공연히 마음이 불안하다. 남의 이목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나와는 정반대로 아주 파격적인 옷차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
고부간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며느리 편이었다. 우리나라 전통 사회의 시어머니들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며느리 시절에 부당한 구박을 받은 여인이 시어머니가 된 뒤에는 옛날 생각을 하고 좋은 시어머니 노릇을 함직도 한데, 사실은 그 반대임에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즈음은 시어머니에게 동정이 가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 나이와 신분이 시어머니에게 가깝게 되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세상의 판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양지에 그늘이 지고, 음지가 양지로 변한 것이다. 어떤 여자 교수가 미국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는 약간 충격적이다. 그 교수는 미국의 여러 양로원을 돌아보았으며, 그곳에서 한국의 할머니들을 여러분 만났다고 하였다. ..
두메 산골의 하루 해는 어린 나에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겨우 세 가구가 모여 살던 우리 이웃에서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웠고, 어른들은 일손이 바빠서 어린아이 상대할 여가가 없었다. 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서 친구가 되기 어려웠다. 우리 집 바로 이웃에 '언년'이라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고 얼굴은 수수한 편이었으나, 살림이 가난해서 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훈육에 신경을 쓸 만한 여유가 거의 없는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언년이는 한마디로 야생마 같은 아이였다. 세 가구 이웃에는 언년이밖에 같은 또래가 없었다. 자연히 자주 만나게 되었지만, 아주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남자는 남자끼리 놀아야 한다는 유교식 교육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또는 언년..
사람의 평균 수명이 크게 늘었다고는 하나, 80세를 넘기기는 지금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 제한된 이 시간 속에서 뜻 있고 보람찬 삶을 이룩하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설계와 실천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멋있게 사는 것일까? 멋있는 길이 오직 한 줄기로만 뻗어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의 소질과 취향 그리고 형편에 따라서 각각 다른 길이 모두 뜻과 보람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음직하다. 예술가의 생활은 언제 어느 모로 보아도 멋과 보람으로 가득 차 있다. 명성이 높은 예술가라면 더욱 좋을 것이며,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경우라 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여 창작의 길로 정진하는 모습에는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위기가 따라 다닌다. 참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여 우..
동서남북을 헤아리는 방향감각이 그믐밤처럼 어두우니, 길눈에 관해서는 당연히 천치天痴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 단지로 이사했을 때, 그 집이 그 집 같아서, 남의 집 현관문 열쇠 구멍에 우리 집 쇳대를 넣으려고 시도하다 깜짝 놀라서 달아난 전과가 있을 정도입니다. 나의 딱한 처지를 잘 아는 친구들은 듣기 좋은 말로 위로합니다. “조물주는 공평무사한 존재여서 한 가지 일에 관하여 극도로 무능한 사람에게는 다른 일에 대한 능력을 후하게 배정함으로써 균형을 얻도록 한다”는 것이 그 위로하는 말의 요지입니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지껄이는 헛소리라기보다는 분명히 일리가 있는 말로서 다가옵니다. 나에게도 남보다 뛰어난 능력이 적어도 한 가지는 있을 것이라는 믿음 비슷한 것이 생겼습니다. 내가 가진 남..
글을 쓴다는 것 / 김태길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
작금의 심정 / 김태길 대한민국 학술원이라는 고령집단에 깊이 관여한 까닭으로, 팔순이 넘는 나이임에도 근래 문상問喪의 기회를 자주 가졌다. 문상을 거듭하는 가운데 삶의 덧없음을 새삼 느껴온 작금이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목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홀연히 떠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 삶과 죽음의 사이가 멀고먼 거리라는 착각 속에 살아온 세월이 가소롭다. 삶과 죽음이 바로 이웃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었던 탓으로, 앞을 다투며 짧은 시간을 길게 보낸 나날이 어리석었던 것이다. 스피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존재하는 모든 개체個體들은 하나뿐인 대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이며, 이 점에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다시금 진리로서 다가온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 김태길1 좋은 글은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글재주와 짜임새에 있어서 나무랄 곳이 없더라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좋은 글이 아니다. 글이 감동을 주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표현의 절묘함이 감동을 주기도 하고, 작품 속을 흐르는 정서가 감동을 일으키기도 하며, 세상을 보는 작가의 안목이 감동을 부르기도 한다. 한당(閑堂)의 수필 는 특별히 문장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그 가운데 깊은 정서가 흐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감명 깊게 읽히는 것은, 그 가운데 심오한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당은 이 작품에서 청(淸)대 말기의 중국학자 유월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유월이 과거에 응시했을 때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花落春仍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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