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내가 쓴 연애편지는 작가 뺨쳤지.” 오랜만에 만난 초등 동창의 너스레다. “아쉽다 책으로 묶였다면 베스트셀러가 됐을 텐데…” 나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왜 아니겠는가? 사춘기 시절, 누군가로 인해 까닭 없이 가슴이 뛸 때, 상대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필살기. 한 줄 한 줄 밤새워 편지를 썼을 것이다. 썼다 지우기를 수십 번. 편지쓰기 습작은 나날이 필력이 붙었을 것이다. 그런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글쓰기 실력의 정점도 그즈음 이었음을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가슴앓이 편지를 쓴 사람이 어디 그 친구뿐이랴. 누구나 연서를 쓰는 순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활용했을 것이며, 스스로의 검열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봉투에 봉인되었을 터. 그러니 비록 유치함과 조잡함이 유..
2014 동양일보 신춘문예 당선 따당~땅, 따당~땅, 왼손으로는 건반을 타건하며 오른손은 햄머로 조율 핀을 조여 간다. 혼을 모아 공중에 흩어지는 맥놀이들을 잡아 동음 시킨 뒤, 현들을 표준 음고에 맞춘다. 엇박자로 두들겨 생기는 맥놀이들, 기억저편서 들려오는 아련한 노래 소리들과 겹쳐진다. 들린다…. 그리운 가락들이 들려온다. 아!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부르시던 엇박자 가락들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몸이 아파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은 더욱 선명하게 들리던 소리들이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그윽하고 정겨운 가락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던 소리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조율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머니 손바닥처럼 뻣뻣하고 거칠거칠한 현들을 쓰다듬었다. 현이 파르르 떤다. 두들겨 맞고 ..
전주 서남쪽 모퉁이에는 푸른 산이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곳에는 백로들이 날아와 터를 잡고 살았다. 나는 가끔 이곳을 지날 때면 떼거리로 앉아 끼룩끼룩 소리 지르고 날개를 펄럭이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넋을 놓았다. 가까이에서 보면 분명 커다란 새이지만 멀리서 보면 내 유년 시절 파란 잎 위에 몽글몽글 핀 목화송이처럼 고왔다. 또 다른 때는 겨울철 소나무 위에 소복이 내렸던 눈이 녹아내리고 조금씩 남아있는 잔설처럼 아련하기도 했다. 어쩌다 목을 길게 내밀고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날 때 그 기세란 가히 주변을 나는 다른 새들을 압도하는 공포의 몸짓이었다. 때로는 멈춘 듯 정지된 상태로, 때로는 벼락 치듯 요동치는 몸놀림은 정중동 자연의 순리에 딱 맞는 새인 듯했다. 목 줄기 따라 흘러내린 유려..
창고에서 가장 큰 가방을 꺼냈다. 앞뒤로 볼록한 가방의 모양새가 내 마음을 부풀게 했다. 사실 나를 더 설레게 하는 것은 남편을 떼어놓고 간다는 거였다. 내 옷, 내 신, 내 모자, 내 화장품 등, 내 소지품만으로 여행 가방을 꾸리는 것으로도 스트레스가 반은 풀리는 것 같았다. 그가 오랜 승선생활을 끝내고 내 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모든 게 감격스러웠다. 칫솔 통에 그의 칫솔이 꽂혀 있는 것, 그의 속옷이 빨랫줄에 널려 있는 것, 외출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 “당신이야?” 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까지. 인생의 참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마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부턴가 우리는 서로를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배에서는 선장의 말 한 마디에 모두가 “Yes, Sir"을..
인생의 길에는 매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코로나19의 불청객이 나타나 갈 길을 막아버렸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 꽃들은 만발하였다. 답답하여 홀로 고덕산을 향하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십여 년 전에 등산모임에서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 동물원에서 출발하는 1000번의 버스를 집 앞에서 타고 시내를 돌아 좁은 목 약수터 앞에서 내렸다. 시계를 보니 10시를 가리키며 초침은 째깍 째깍 가고 있었다. 나도 뚜벅뚜벅 한걸음씩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옛 추억을 생각하며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표지판에 대승사와 남고사 길이 나타났다. 첫 번째 선택의 순간이다.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대승사 길로 향했다. 한참을 가니 백구 네 마리가 달려 나와 멍멍 짖어댄다. 겁이 났지만 조용히 걸어가니 달려들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하루가 시작되면서 반갑게 맞아준다. 금쪽같은 사과 반쪽인데, 한 개는 양이 많아 반쪽씩 아침 식사 전 먹고 있는 것이다. 공복에 사과를 먹으면 영양섭취가 좋아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이다. 입안에서 청량감은 상쾌한 기분이다. 날마다 먹는 사과도 품종에 따라 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하였다. 궁금하여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9월~10월에 수확하는 홍로는 신맛이 거의 없고 당도가 매우 높으며 추석 제수용품과 선물용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부사는 10월~11월부터 수확하며 비바람 서리를 맞고 추위를 견디며 자랐기에 저장성이 좋으며 맛도 좋아 꿀 사과라고 하였다. 7월~8월에 볼 수 있는 아오리는 여름풋사과인데 가피가 얕고 푸르지만 과즙이 많고 새콤한 맛이라고..
층층이 겹쳐있는 깃털이 예사롭지가 않다. 앞에서 보면 전장에 나가는 로마 장수의 머리에 쓴 투구모양을 하고 있고, 옆에서 보면 깃을 잔득 세운 채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를 위협하는 독수리의 모습을 닮아 있다. 경주박물관, 내 눈길을 붙든 것은 안압지 용마루를 장식했던 치미다. 하지만 치미는 지난 날 위엄을 부리고 앉아 있던 그 모습이 아니다. 한껏 멋을 부렸지만 겉모습과 달리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발을 굴리며 인기척을 내보지만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아직도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걸까. 넋을 놓고 있는 치미의 모습이 지난 날 우리 집 용마루에 올라앉은 망새의 슬픈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향 집은 헐리고 없었다. 기둥을 떠받치고 있던 주축 돌도 장독대 옆에 서 있던 감나..
폐지 더미에 섞여있기에는 참 고운 책이다. 들고 갔던 신문뭉치를 옆에 놓아두고 폐지 위에 놓여 있는 동화책 한 권을 주워 이리저리 살펴본다. 누군가가 금방 내려놓고 간 모양이다. 찢어지거나 낙서가 남겨진 것도 아니고 그림도 큼직하고 표지가 무척 고급스러워 보인다. 속지를 들여다보니 활자가 크고 선명하며 그림들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어린이들이 보기에 편리하게 만들어진 창작 동화책이다. ‘누가 내려놓고 갔을까,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새 책을…….’ 아깝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주변에 돌려 볼 어린아이가 없다. 슬며시 자리를 옮겨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놓고 발길을 돌린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네 살 많은 오빠가 처음으로 동화책을 두 권 사 주었다. 음악 감상과 책 읽기를 좋아하던 오빠는 아마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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