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도 좋지만 한자도 공부해둬라 엄마가 말씀하셨지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천자문은 따분해 천팔백자 지루해 엄마, 관심 있는 걸 하면 머리에 잘 들어온다고 했지 내게 관심 있는 건 그녀뿐이야 그럼 계집녀(女) 들어가는 글자부터 해봐라 좋아좋아 왜 여자가 좋은지 알겠어 좋을 호(好)에 여자가 들어 있잖아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어 그녀가 호호(好好) 배꼽으로 웃어주었지 초승달 같은 하얀 미(媚)소도 벅찬데 보름달 같은 배꼽 미소에 내 모든 느낌이 충돌했어 이름은 또 어떻고 아름다울 연(娟)에 예쁠 아(娥) 연아처럼 예쁜 아인 없어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내 운명은 비로소 시(始)작된 거야 여자는 묘(妙)한 동그라미 과녁처럼 동그라미를 많이 쳐놓고 나를 어지럽게 해 갈 지(之)자로 비틀거리게 해 그리곤 "..
누군가가 내게 그리움에 대해 말하라면, ‘가슴에 흐르는 강’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잔잔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여울져 흐르는 강줄기를 누구나 가슴 복판에 품고서 살아간다. 그 물살이 그려내는 무늬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천차만별의 갈래로 흐른다. 친정 선산에서 새해 일출을 맞았다. 아버지 산소 앞에서 온몸 가지런히 하고 절을 하시는 어머니 모습이 풋풋한 소녀 같다. 아니, 나풀거리는 한 마리 나비 같다. 지아비에게 정성을 다하는 여인의 표상(表象)이 바로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뒷모습이 고결해 보인다. 어머니 가슴엔 아마도 뜨거운 강이 흐르리라. 그 출렁임을 어쩌지 못하여 저렇게 춤을 추시는 게다. 아버지 계실 때나 사별 후에나, 그분 앞의 어머니는 귀여우면서도 정갈한 여인이다. 나는 같은 여인으로서 ..
오랜만에 시어머님을 뵈러갔다. “경동시장에서 닭발이 한 보따리에 5천원이라는데 사다 줄 사람이 없네?” 시아주버님이 아픈 아내를 간호하다 다친 허리를 우계묵을 먹고 효험을 본 일이 있었다. 어머니도 허리통증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우리가 찾아갔다. 나는 경동시장과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며느리로서 재료만 덥석 드리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잘 달여서 가져오겠다고 약속을 드렸다. “그래, 얼마나 더 사실까?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자.” 인터넷으로 래시피를 검색했다. 핏물 섞인 닭발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소름이 돋고 속이 매스꺼웠다. 나는 원래 비위가 아주 약하다. 집에서 사골이나 돼지고기 등을 요리할 때 특유의 냄새로 곤욕을 치른다. 어머님을 위해 시도해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지만 설..
노적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인 들판에 간밤에 서리가 내렸나 보다. 이제 마악 동산을 기어 오른 햇살이 퍼져 풀잎에 엉긴 서릿발이 반짝인다. 뜨끈뜨끈한 국수동이를 이고 미역바우 언덕에 올라서니 왕왕거리는 경운기 소리가 흥겹게 들려온다. 오늘은 우리 집 타작하는 날이다. 지실떠는 아기의 재롱이 더 귀엽듯이 지난 여름 유난스러웠던 가뭄을 치르고 태풍을 견디고 얻은 결실이라 그런지 바라보는 감회가 더욱 깊다. 10여 명의 일꾼들은 8마력 경운기를 둘러싸고 맡은 일에 여념이 없다. 볏단을 끌어내리는 사람, 끌러주는 사람, 기계에 볏단을 물리는 사람, 포대를 들고 알곡을 받아내는 사람, 검불 더미를 갈퀴질로 걷어내는 사람, 털린 볏짚을 묶는 사람, 빵빵하게 채워진 마대를 묶는 사람, 한편에서는 고래실 논에서 경운기 한..
음성 장날 고추 모 세 판을 사다 심었다. 오이고추, 청양고추, 일반 고추다. 모종을 파는 상인의 생존율 100%라는 부연설명까지 들어서 그런지 땅내도 못 맡은 모종들이 싱싱하기가 청춘이다. 모종을 심고 나면 한 보름 동안은 빈약한 떡잎가지 시들배들한다. 겨우 어른 손 길이만한 어린 것들이 적어도 보름 정도는 죽느냐 사느냐 사투를 벌일 것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땅내를 맡은 뿌리들이 몸살을 끝내고 착지를 한다. 대궁이 탄탄해지고 잎들은 제법 작은 바람에도 너울거린다. 이때쯤이면 줄기에서 영어 알파벳 Y자 모양의 가지가 나온다. 농군들은 여기를 방아다리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옛날에 쓰던 디딜방아를 틀어놓은 모양이다. 아직 어린 대궁인데 어쩌려고 가지부터 버는지 속내는 모르나 저도 꿍꿍이속이 있을 터..
한 뼘 남짓한 나무토막을 바라본다. 어느 냇둑에서 한 세월 보내다가 고요히 임종한 은사시나무, 그 숨결 더듬으며 눈을 맞춘다. 목각을 처음 시작한 날, 나무토막 앞에서 나도 나무토막이 되었다. 표정 없는 나무에서 무엇을 캐내야 하는지, 어디를 어떻게 파야 하는지 오리무중이었다. 칼이라고는 연필 깎는 칼을 써 본 것과 도마에 무나 파를 썰던 경험뿐, 예리한 칼끝에 시선을 피하며 슬그머니 창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런 내색을 알아차린 선생님이 칠판에 글을 써나갔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자. 끈질기게 일생 동안 취미로 할 사람만 시작하자. 나무와 대화하며 성질을 알자. 나무토막을 세워본다. 안정감 있게 서 있어야 평생 불편하지 않다고 한다. 이 나무토막에서 사람의 얼굴이 태어날 것이다. 앞뒤 어느 ..
지난 토요일 오후 집들이하는 아우집에 친정 형제들이 모였다. 모처럼 만나는 기회여서 쌓인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틈에 청주에 사는 아우가 슬몃 내 손을 잡았다. “언니, 나 이거 선물 받았어”하며 블라우스 앞자락을 비집어 보였다. 아우의 가슴에는 하얀색 브래지어가 봉싯하게 솟아 있는데 아우의 얼굴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순간 (아휴, 똑같아 똑같아)를 속으로 외치며 먼 세월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서는 월남전에 파병된 국군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썼었다. 고학년 어린이들과 전 직원이 참여해서 편지와 위문품을 보냈는데 고맙다는 답장이 속속 날아들었다. 특히 여교사들에게는 더 많은 답장이 왔고 애틋한 사연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 p교사는 남자인데도 편지의 회수가 잦아 우리는 ..
일부러 씨앗을 흘리지 않고서야 저런 곳에 자리를 잡을까 싶을 만큼, 우리 아파트 동백의 위치는 보편적이지 않다. 사립문 앞이라면 정취라도 있지. 커다란 통 유리문 앞에 그것도 콘크리트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것을 볼라치면 여간 싱거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화단의 규모가 동백을 더 왜소하게 만들었다. 또 처연하기로는 이길 자가 없다.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언제 저 꽃이 청렴과 절조의 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화단 귀퉁이에 모로 선 폼이 따돌리는 것처럼 보인다. 테두리 안으로 든 것도 아니고 못 든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가 볼품이 없었다. 얼마 전 퇴근길에 생긴 일이다. 동백이 타고 있었다. 볕에 까칠하게 타들어가는 동백을 보니, 이 계절을 겪느라 애를 먹는 듯 보였다. 꽃이 져도 어찌 저렇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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