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소식이 왔다. 며느리가 손주를 잉태하였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새 생명을 드디어 맞이한다는 현실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때가 내 나이 예순 일곱이었다. 친구들의 손자는 대부분 중학생 들이다. 내가 결혼한 지 십년이 지나 아들을 얻었으니 자연히 손주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며느리가 안 볼 때 자꾸 며느리의 배만 바라보던 십 개월이 왜 그리도 더딘지, 손가락으로 달수만 헤아리고 있었다. 드디어 손녀가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된 나는 며느리가 입원하고 있는 여성 병원으로 달려갔다. 강보에 싸인 손녀가 며느리의 품에 안겨 세상모르고 잔다. “너의 탄생을 축하한다!” 기쁨에 못 이겨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옆에 있어 그러질 못했다. 얼마나 오래 동안 기다렸던 일인가.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할아..
Ⅰ. 문학이란 진실의 표현이어야 한다. 다만 소설은 허구를 설치해서 진실 표현을 하고, 수필은 허구를 설치하지 않고 진실 표현을 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수필도 부분적으로는 허구적인 것을 가미하여 작품한다는 이도 있다고 들었지만, 그것마저 용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몰라도, 체험 세계를 그리는 것은 허구를 용납하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나는 문예작품의 심사를 위촉받으면, 수필의 경우 ‘거짓말’을 쓴 것은 아닌가 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왜냐하면 체험 사실을 거짓말로 쓰면 그 글은 이미 수필로서는 실격이 되는 때문이다. 얼마 전 일이다. 어느 기관이 모집한 현상 문예작품의 수필 부문을 심사한 바 있는데, 짜장면 그릇을 두고 쓴 대목이 누군가의 글에서 본..
무엇인가 써야 하는데 꼬투리가 잡히지 않는다. 무슨 의무감처럼 마음은 부질없이 써야한다는 쪽으로 기운다. 왠지 불안하고 소화불량에라도 걸린 느낌이다. 무슨 덩어리 같은 것이 내 배속에서 꿈틀대는 것 같다. 이상하지만 그런 꿈틀대는 것 같은 정체불명에 시달리고 있다. 얄궂은 병일 것이라고 혼자만의 서툰 진단을 한다. 무엇인가를 쓰겠다는 방향으로 다시 생각에 잠긴다. 눈사람을 굴리듯이 머리를 굴린다. 등치가 점점 커지는 눈사람을 골목에 세워두고 눈과 코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단다.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귀를 단다. 벙거지를 얹어준다. 눈사람 곁에 서서 사진을 찍고 싶다. 그러나 사진을 찍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는 사이 눈사람은 사라졌다. 존재하는 것은 눈사람처럼 사라진다. 평생을 함께 하리라고 믿었던 사람..
절가는 길 통나무를 짤막하게 잘라, 비탈진 산길에 가로 박아놓았다. 시멘트나 돌층계와 다른 부드러움을 받는다. 절 스님이 만든 나무층계이리라. 오래된 모습, 드러난 껍질엔 곰팡이버섯이 돋아있다. 길 양쪽에 소나무들이 들어차 터널이 된 산길은, 바람의 통로처럼 시원했다. 길을 덮다시피 한 솔가지는 볕을 막아 그늘이 두껍고 솔향까지 향긋이 괴었다. 솔바람은 어느 새 땀방울을 걷어갔고, 적요 한가운데서 저절로 두 팔이 올라가 가슴이 펴졌다. 심호흡을 시작하니 가슴 아래 복부까지 상쾌했다. 이런 맛에 산에 오는 것이다. 아무도 묻지 않는데, 대답을 나 스스로에게 했다. 미처 다 삭지 아니한 붉은 솔잎이 뿌리 틈새에 남아 있다. 솔잎도 낙엽이 되면 붉어진다. 한 세상을 살고 다른 세상으로 가는 과정에서 색깔이 변..
서른을 넘긴 두 아들이 사과를 먹는다. 빨간 사과를 껍질째 베물어 쯥, 하고 단물을 한번 빨아 삼키고 와작와작 씹는다. 과즙을 튀기며 몇 번 씹다가 삼키느라고 목울대를 꿈틀거린다. 그게 채 다 넘어가기도 전에 이들은 또 콧등에 주름이 잡히도록 입을 크게 벌려 팍 하고 사과를 베문다. 또 쯥, 하고 단물을 빤다. 넋 놓고 바라보면서 나도 덩달아 입술을 움질거릴 뿐 껍질을 벗겨주려 하지는 않고 고작 “그래두 위아래 배꼽일랑 피해 먹어라.” 충고한다. 아이 둘이 입 안 가득 사과를 문 채 고개만 한 번씩 주억거린다. 과일의 꼭지와 꽃자리에 농약이 몰려 있어 위험하니 그 부분만이라도 피하라는 어미의 말뜻을 가볍게 받는 저 시퍼런 젊음이라면 하긴 비상을 삼킨대도 끄떡없을 것 같다. 괜히 또 꾀죄죄한 걱정을 했구나..
삭정 개비에 탁, 성냥을 켠다. 그을음이 꼬리를 흔들며 불꽃이 일어난다. 불이 붙었는가 하면 꺼지고 꺼졌는가 하면 다시 붙는다. 일단 불이 붙으면 여왕 옹위하듯 해야 한다. 우격다짐하면 토라져 버리니 조심스럽다. 붉은 혓바닥을 길게 뺀 불꽃이 다짜고짜 나무를 휘어 감고 요망을 떤다. 나무는 양반 무게를 잡고 만삭의 몸처럼 잔뜩 팽창해 있다. 길고 뜨거운 입맞춤을 퍼부으며 떡 주무르듯 몸을 주물럭대니 그만 얼이 뿅 빠진다. 갓 쓴 해태처럼 무춤 무춤 수염을 빳빳이 세웠으나 그건 계면쩍어 괜히 그러는 것이렷다. 온몸이 녹작지근해지고 정신이 핑 돌아 나사가 풀어진다. 간질간질 꽃봉오리 신열이 돋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참다 참다 못 참겠다는 듯이, 콘크리트 벽이 갈라지듯이 뿌지직, 소릴 지른다. 몸이 달궜다는..
문재인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취임사를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정오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열린 제19대 대통령 취임선서 행사에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역사가 시작된다"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 전문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의 위대한 선택에 머리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으로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지금 제 두 어깨는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부여받은 막중한 소명감으로 무겁습니다. 지금 제 가슴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려는 새로운 대..
번 역 문 한 번 웃으며 만나는 데 뭔 인연이 필요하단 말인고 쓸쓸한 마을 기나긴 밤에 홀로 잠 못 이루고 있네 오늘 아침에 도리어 쌍성(雙城) 향해 떠났다 하니 하늘 끝자락의 구름과 나무는 더욱 아득하여라 一笑相逢豈有緣일소상봉기유연 孤村永夜不成眠고촌영야불성면 今朝却向雙城去금조각향쌍성거 雲樹天涯倍渺然운수천애배묘연 - 이춘영(李春英, 1563~1606), 『체소집(體素集)』 상권 「미곶(彌串)으로 신경숙(申敬叔 신흠(申欽))을 찾아갔더니 경숙이 이미 떠났다기에 홀로 자다가 감회가 들다. [彌串訪申敬叔, 敬叔已去, 獨宿有感.]」 해 설 ‘만남’을 뜻하는 한자는 제법 많다. 우(遇), 봉(逢), 조(遭), 해(邂), 후(逅) 등등 소위 ‘책받침(辶)’이라는 부수가 들어가는 이런저런 글자들이다. 그런데 이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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