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의 휴일 / 박준 아버지는 오전 내내/ 마당에서 밀린 신문을 읽었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종로에나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날은 찌고 오후가 되자/ 어머니는 어디서/ 애호박을 가져와 썰었다/ 아버지를 따라나선/ 마을버스 차고지에는/ 내 신발처럼 닳은 물웅덩이/ 나는 기름띠로/ 비문(非文)을 적으며 놀다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바퀴에/ 고임목을 대다 말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동생 / 박준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탕탕탕 뛰어 귓속의 강물을 빼내지 않으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은 여자아이가, 밤에 소변보러 갈 때마다 강가로 불러낸다고 했습니다 입 속은 껍질이 벗겨진 은사시나무 아래에서도 더러웠고요 먼 산들도 귀울림을 앓습니다// 강에 일곱이 모여 가서 여섯이나 다섯으로 돌..

낙화(落花) / 이형기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 이형기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아, 해바라기여 / 윌리엄 브레이크 아, 해바라기여! 시간에 지쳐서/ 태양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헤아리며/ 나그네의 여정이 끝나는/ 저 향기로운 황금의 나라을 찾는다// 욕망으로 수척해진 젊은이와/ 백설의 수의 걸친 파리한 처녀가/ 그들의 무덤가에서 일어나/ 가기를 열망하는 나라// 그 곳은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자 하는 곳이니라.// 첫사랑 / 괴테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날/ 그 첫사랑의 날을,/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시절의/ 그 사랑스러운 때를,//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 누가 돌려주랴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낙엽 / 레미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 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 / 장석주 1/ 후생의 아이들이 이마를 빛내며/ 동과 서편 흩어지는 바람 속을 질주한다./ 짧은 겨울해 덧없이 지고/ 너무 오래된 이 세상 다시 저문다./ 인가 근처로 내려오는 죽음 몇 뿌리/ 소리없이 밤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 2/ 회양목 아래에서/ 칸나꽃 같은 여자들이 울고 있다./ 증발하는 구름같은 꿈의 모발,/ 어떤 손이 잡을 수 있나?// 3/ 밤이 오자 적막한 온천 마을/ 청과일 같은 달이 떴다./ 바람은 낮은 처마의 불빛을 흔들고/ 우리가 적막한 헤매임 끝에/ 문득 빈 수숫대처럼 어둠 속에 설 때/ 가을 산마다 골마다 만월의 달빛을 받고/ 하얗게 일어서는 야윈 물소리.// 4/ 어둠 속을 쥐떼가 달리고/ 공포에 떨며 집들이 긴장한다.// 하나..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집] 목차 1~81 1. 바다를 본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2. 설교하는 바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3. 끊을 수 없다 성산포에서는 끊어도 이어지는/ 바다 앞에서 칼을 갈 수..

바라춤 -서장 / 신석초 환락은 모두 아침 이슬과도 같이 덧없어라. ―싯타르타//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아 여러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추이고/ 뒤안 이슷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레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장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

소녀 / 이상 소녀는 확실히 누구의 사진인가 보다. 언제든지 잠자코 있다.// 소녀는 때때로 복통이 난다. 누가 연필로 장난을 한 까닭이다. 연필은 유독(有毒)하다. 그럴 때마다 소녀는 탄환을 삼킨 사람처럼 창백하고는 한다.// 소녀는 또 때때로 각혈한다. 그것은 부상(負傷)한 나비가 와서 앉는 까닭이다. 그 거미줄 같은 나뭇가지는 나비의 체중에도 견디지 못한다. 나뭇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소녀는 단정(短艇) 가운데 있었다——군중과 나비를 피하여. 냉각된 수압이——냉각된 유리의 기압이 소녀에게 시각만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허다한 독서가 시작된다. 덮은 책 속에 혹은 서재 어떤 틈에 곧잘 한 장의 '얇다란 것'이 되어버려서는 숨고 한다. 내 활자에 소녀의 살결내음새가 섞여있다. 내 제본에 소녀의 인두자..

광야(曠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독백 / 이육사 운모(雲母)처럼 희고 찬 얼굴/ 그냥 주검에 물든 줄 아나/ 내 지금 달 아래 서서 있네// 돛대보다 높다란 어깨/ 얕은 구름쪽 거미줄 가려/ 파도나 바람을 귀밑에 듣네// 갈매긴 양 떠도는 심사/ 어데 하난들 끝간 델 아리/ 오롯한 사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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