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남기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 작가의 눈을 바라 보아야 한다./ … 등대에 …/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
어머니 / 황금찬 어머니/ 어머니는 항상/ 고향의 하늘 아래에 사십니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손에선/ 고향의 흙냄새가/ 언제나 풍겨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젊어서부터 늙으실 때까지/ 일을 하셨습니다./ 모를 심으시고/ 고추밭을 매시고/ 감자를 캐셨습니다./ 그리고 남루한 옷을 입으시고/ 가난을 견디시며/ 우리들을 기르셨습니다.// 어머니/ 그날 어머님은/ 종일 굶으셨지요/ 저녁이라고 콩죽 한 사발/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마저도 배고프겠다고/ 다 저희들에게 나누어주시던 어머니/ 그때 저는 왜 그렇게도 철이 없었던지/ 어머님이 굶으시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진달래가 피는 봄/ 어느 날 제가 늦게 돌아오는 밤이면/ 동구밖 느티나무 옆에/ 별을 이고 서서/ 제 발소리가 저만치 들려오면/ ..
귀천(歸天)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소프라노 조정선 가곡 * '귀천' 테너 조창후, 바리톤 박정섭 가곡 새 / 천상병 저것 앞에서는/ 눈이란 다만 무력할 따름/ 가을 하늘가에 길게 뻗친 가지 끝에,/ 점찍힌 저 절대 정지를 보겠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미묘하기 그지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橋)는 무슨 상형(象形)인가,// 저것은/ 무너진 시계(視界)위에 깃을 펴고/ 핏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듯이..
어머님의 성서(聖書) / 김남조 고통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 성숙해지며/ 크낙한 사랑처럼/ 오직 침묵합니다// 복음에도 없는/ 마리아의 말씀, 묵언의 문자들은/ 고통 중에 영혼들이 읽는/ 어머님의 성서입니다// 긴 날의 불볕을 식히는/ 여름나무들이,/ 제 기름에 불 켜는/ 초밤의 밀촉이,/ 하늘 아래 수직으로 전신배례를 올릴 때/ 사람들의 고통이 흘러가서/ 바다를 이룰 때/ 고통의 짝을 찾아/ 서로 포옹할 때// 어머님의 성서는/ 천지간의 유일한 유품처럼/ 귀하고 낭랑하게/ 잘 울립니다// 아버지 /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는가 / 파블로 네루다 하루가 지나면 우리는 만날 것이다./ 그러나 하루 만에 많은 일이 일어난다./ 거리에서는 포도를 팔고/ 토마토는 껍질이 변한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하던 소녀는/ 다시는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 예고 없이 우편배달부가 바뀐다./ 이제 편지들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황금빛 잎사귀 몇 개로 나무는 다른 나무가 된다./ 이 나무는 더 풍성해졌다.// 오래된 껍질을 지닌 대지가 그토록 많이 변하리라고/ 누가 우리에게 말해 주었는가?/ 어제보다 더 많은 화산이 생겨나고/ 하늘은 새로 생겨난 구름들을 가지고 있으며/ 강물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세워지는가!/ 나는 지금까지 수백 개의 도로와 건물들,/ 그리고 배나 ..
그냥, 그래 / 김이하 요금 내가 사는 건, 그냥 그래/ 가슴에 박힌 큰 말뚝보다 자잘한 가시에 아파하며/ 막 화를 내고 그래, 입으로 욕도 뱉고 살아/ 어머님 가시고, 아우도 스러지고/ 그들의 궤적이 뒤꼭지에 퀭하게 박혀도/ 아직 견딜 만은 한 거지// 그러다 같이 바라보던 저 꽃 한 송이 때문에/ 겨울밤 함께 나누던 라면 한 가닥 때문에/ 온 창자를 토해 버릴 지경이 되는 거지/ 어쩌다 같이 숟갈 담그던 뜨끈한 고깃국을/ 한 숟갈 입에 넣다, 울컥하고 말다니/ 그런 게 환장하는 거지// 엊그제는 이를 닦다 말고 아우 얼굴이/ 거울에 스치는가 싶더니 앞이 감감하더라고/ 그새 내 아린 마음 살아 있는 아우에게 갔던지/ 어제는 내가 저희들 꿈에 두 번이나 다녀갔다고/ 전화가 오더라고, 그냥 그래// 흐린 ..
호피(虎皮) 위에서 / 김관식 해 진 뒤, 몸 둘 데 있음을 신에게 감사한다!/ 나 또한 나의 집을 사랑하노니/ 자조근로사업장에서 들여온 밀가루 죽(粥)이나마 연명을 하고/ 호랑이표 시멘트 크라프트 종이로 바른 방바닥이라/ 자연 호피를 깔고/ 기호지세(騎虎之勢)로 오연(傲然)히 앉아/ 한미합동! 우정과 신뢰의 악수표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일망정/ 행(行). 주(住). 좌(坐). 와(臥)가 이에서 더 편함이 없으니/ 왕(王). 후(候). 장(將). 상(相)이 부럽지 않고/ 백악관 청와대 주어도 싫다/ G.N.P가 어떻고,/ 그런 신화 같은 얘기는 당분간 나에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병상록(病床錄) / 김관식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한가위 / 구상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 신부(神父)형: 나의 친형 구대준(具大浚)은 가톨릭 신부였음. * 대녀(代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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