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1934년 2월 《문학》제2호에 실렸다. 시(詩) / 김상용 골짜기를 혼자 거닐 때……. 별안간 무슨 소리고 내고 싶은 충동이 난다. 입술을 새 주둥아리처럼 한데 모아야겠다. 새 주둥아리로 압축되었던 '김'이 질주한다./ 그 소리가 (분명 소리리라) 건너편 절벽에서 반발한다. 곳곳에 작은 작열의 불꽃. 이때 나의 새 발견이 있다 하고 가슴이 외쳐준다. 경이다./ '시(詩)'란 작열이다. '저'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 해서 죄는 안 된다. '돌'이 ..

어머님에의 헌시 / 박두진 오래 잊어버렸던 이의 이름처럼/ 나는 어머니 어머니라고 불러보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불러보면/ 나는 먼 어렸을 때의 어린 아이로 되 돌아가// 그리고 눈물이 흐르네/ 내가 이 세상에서 처음 입을 떨 때/부르던 첫 말/ 그 엄마 지금은 안계시고/ 이 만큼이나 나이가 들어서야/ 어머니 어머니라는 이름의 / 뜻의 깊이를 아네// 애뙤고 예쁘셨던/ 꽃답고아름다우셨을 때의/ 어머니보다는/ 내가 빨던 젖이/ 빈 자루처럼 찌부러지고/ 이마에는 주름살/ 머리터럭 눈같이 희던 때의/ 가난하고 슬프신/ 그 모습 더 깊이 가슴에 박혀/ 지금도 귀에 젖어/ 음성 쟁쟁하네/ 지금 이렇게 나 혼자 외로울 때/ 마음 이리 찢어지고/ 불에 타듯 지질릴 때/ 그 어머니 지금// 내 곁에 계시다면/ 얼마나 ..

후렴 / 김명인 어머니가 후렴처럼 물으신다, 늬 누고?/ 수없이 일러드린 그 물굽이다, 콱콱 결리는/ 가슴속 복면들과 마주서면/ 어디선가 돛폭 구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몇 년째 벗어나지 못한 무풍지대에/ 한 점 바람이 분다는 것일까?/ 풍파에 펼쳤다면 격랑 속일 텐데/ 어머니는 여러 해째 같은 바다를 헤메신다/ 후렴조차 없다면 거룻배는/ 돌아서지 않는 썰물에 휩쓸린 것이다// 화엄(華嚴)에 오르다 / 김명인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

춤 / 박형준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연습을 한다.// 근육은 날자마자/ 고독으로 오므라든다// 날개 밑에 부풀어 오르는 하늘과/ 전율 사이/ 꽃이 거기 있어서// 絶海孤島,/ 내려꽂혔다/ 솟구친다/ 근육이 오므라졌다/ 펴지는 이 쾌감// 살을 상상하는 동안/ 발톱이 점점 바람무늬로 뒤덮인다/ 발아래 움켜쥔 고독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 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 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 서녁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 천길 절벽 아래/ 꽃파도가 인다// 멍 / 박형준 어머니는 젊은 날 동백을 보지 못하셨다/ 땡볕에 잘 말린 고추를 빻아/ 섬으로 장사 떠나셨던 어머니/ 함지박에 고춧가루를 이고/ 여름에 떠났던 어머니는 가을이 ..

꼭지 /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하관 / 문인수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다는 걸.// 우리는 말했다 / 천양희 함께 있어도 거리를 지키는 벼가 있다/ 우짖음으로 자신을 지키는 새가 있다/ 울음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벌레가 있다/ 하루에 몇십만번 물결치는 파도가 있다/ 물살이 역류하는 개울이 있다/ 나무 위에 사는 나무가 있다/ 잎끝에 돌기를 가진..

맨발 /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독신의 아침 / 최하림 안개 속으로 부드러운/ 가지를 드러내는 버드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옥수수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마루를 닦기 시작한다/ 책들을 치우고 의자를 옮기고/ 쓰레기통을 비운 뒤 구석구석/ 물걸레질하다 보면 현관으로는/ 햇빛이 들어와 물살처럼 고이고/ 바람이 산 밑으로 쓸리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철새들이 말하며 가는 것을 본다/ 순간 나는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그리운 것들이 모두 집 밖에 있다.// 봄 / 최하림 영화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두 추워서 갑자기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은 공기 조각들이/ 부서져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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