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은 고양이로다 /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1924년 5월에 《금성(金星)》 1호에 발표. 고양이의 꿈 / 이장희 시내 우에 돌다리/ 달아래 버드나무/ 봄안개 어리인 시냇가에, 푸른 고양이/ 곱다랗게 단장하고 빗겨 있소. 울고 있소./ 기름진 꼬리를 치들고// 밝은 애달픈 노래를 부르지요./ 푸른 고양이는 물올은 버드나무에 스르를 올나가/ 버들가지를 안고 버들가지를 흔들며/ 또 목노아 웁니다, 노래를 불음니다.//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고/ 칼날이 ..

와사등(瓦斯燈) /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雜草)인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광장 / 김광균 비인 방에 호올로/ 대낮에 체경(體鏡)을 대하여 앉다// 슬픈 도시엔 일몰이 ..

웃은 죄 / 김동환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산 너머 남촌에는 / 김동환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南風) 불 제 나는 좋대나.//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 떼/ 버들밭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불 제 나는 좋데나.// 산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나무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를 오르니/ 구..

시집 '현해탄' 네거리의 순이(順伊) / 임화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

시 / 설정식 대리석에 쪼아 쓴 언어들이 아니라/ 가슴 속을 누가 할켜놓은 상채기 같기도 하고/ 당신의 귓 속을 어루만지는 기후(氣候)와 쉽게/ 궁합이 맞은 천재의 음률이 아니외라// 그것은 뼈에 금이 실려/ 절그럭거리는 원래(原來)의 소리외다// 종(鍾) / 설정식 만(萬) 생영(生靈) 신음(呻吟)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아/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어/ 네 존엄을 뉘 깨트리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다려/ 목메인 명인(鳴咽)을 자아내드뇨// 권력이어든 차라리 살을 아스라/ 영어(囹圄)에 물어진 살이어든/ 아 권력이어든 앗갑지도않은 살을점이라//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거쇼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이드뇨/ 한 아름 공허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뇨// 그..

월향구천곡(月香九天曲) -슬픈 이야기 / 오장환 오렌지 껍질을 벗기면/ 손을 적신다./ 향(香)내가 난다.// 점잖은 사람 여러이 보이인 중(中)에 여럿은 웃고 떠드나/ 기녀(妓女)는 호올로/ 옛 사나이와 흡사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점잖은 손들의 전(傳)하여 오는 풍습(風習)엔/ 계집의 손목을 만져주는 것,/ 기녀(妓女)는 푸른 얼굴 근심이 가득하도다./ 하─얗게 훈기는 냄새/ 분 냄새를 지니었도다.// 옛이야기 모양 거짓말을 잘하는 계집/ 너는 사슴처럼 차디찬 슬픔을 지니었구나.// 한나절 태극선(太極扇) 부치며/ 슬픈 노래, 너는 부른다/ 좁은 버선 맵시 단정히 앉아/ 무던히도 총총한 하루하루/ 옛 기억의 엷은 입술엔/ 포도(葡萄) 물이 젖어 있고나.// 물고기와 같은 입 하고/ 슬픈 노래, 너..

신천 / 이하석 비슬산의/ 숭엄과 신화의 바위가/ 검은 속 왈칵왈칵 쏟아내어/ 질펀한 서사를 이룬 것입니다.// 그 물 대구시내 들어오는/ 가창 끝머리쯤에서/ 맑은 죽음들 품어 쓰다듬는 할머니가 떠먹고,/ 한바탕, 서러운 술을 깨우는 것입니다.// 그렇지, 그 깨움을 들고서야 겨우,/ 어미 강이 되는 것입니다./ 수달이든 왜가리든 고라니든 인간이든/ 선 것들 입에 젖 물린 채/ 마구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 죽은 이들의 자식들 여전히 여기서 자라기에/ 대구분지는 그렇게 문득 또, 환하게/ 젖는 것입니다./ 한바탕, 새로 저항해야,/ 깨어나는 것입니다.// 신천 / 이하석 미아처럼 헤매던 나사 굴러 와 붉은 얼굴로/ 자갈 틈 비집고 든다, 여뀌덤불 밑/ 피라미 아가미 때리며, 젖은 흙 걷어차며,/ 해일 ..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 안도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없는 차가운,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가 넘겨 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 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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