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낡은 집 /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에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족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 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 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라도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

의자 / 조병화 1// 그 자릴 비워주세요/ 누가 오십니까/ "네"// 그 자릴 비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누가 오십니까/ "네"// 그 자릴 비워주셨으면 합니다/ 누가 오십니까/ "네".// 2// 그렇습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아무런 생각 없이/ 잠시 있는 자리/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아무런 딴 생각 없이/ 잠시 머물고 있는 자리/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미안합니다/ 이 자린 저의 자린 아니오나/ 떠나고 싶을 때 떠나게 하여 주십시오.// 3// 내일에 쫓기면서/ 지금 내가 아직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지금 내가 앉아 잇는 자리의 어제들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시간의 숙소를 더듬으며/ 지금 내..

O와 o / 오은 너 O 맞지? 낯선 이의 목소리에 몸이 절로 쭈그러들었다. 당시 나는 벤치에 앉아 모든 생각은 일정 정도는 딴생각이라고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데로 쓰는 것이 생각이니까. 머릿속이 흔들려야 하니까. O 맞네, 맞아! 낯선 이가 느닷없이 손뼉을 치는 바람에 나는 흠칫 놀랐다. 낯섦과 느닷없음이 겹쳐 공포가 되었다.// 무방비 상태일 때는 별도리 없이 위축된다. 오후 두 시에도 그렇고 새벽 두 시에도 마찬가지다. 밝아서 부끄럽고 어두워서 무섭다. 위축된다고 밝히고 나니 몸뿐 아니라 마음도 덩달아 작아졌다. 위축될 때마다 나는 확신한다. 몸과 마음은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몸의 밀도가 낮아질 때마다 마음에도 숭숭 구멍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O는 대답하지 않는다. 주저하는 기색도 없..

여름의 애도 / 이영주 비 오는 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어머니는 부서진 날개를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옆구리일까요. 그때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털 뭉치처럼 온몸이 가려웠었죠. 죽은 사람이 두고 간 것인데. 어머니는 중얼거리다 말고 빗물이 쏟아지는 마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발자국이 지워졌습니다. 어두운 자리 하나만 남아서 점점 깊어지고 있었죠. 모든 게 빗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인데. 너의 할머니는 이것을 두고 갔구나. 우산을 들고 어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을 듣지 못하고 나는 털 빠진 개처럼 옆구리를 긁고 있었죠. 개다 만 빨래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시간. 떠내려가지 못한 날개를 건져 올린 것은 어머니입니다. 찢기고 바스러진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다..

아카이브 / 황인찬 이 계단을 오르면 집에 이른다/ 제비들이 창턱에 앉아 뭐라 떠들고 있다/ 그것이 여름이다// 장미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을 알고/ 무궁화가 피는 것을 보며 여름인 줄을 알고// 벌써 여름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난여름에도 똑같은 말과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순간 이 알아차림을 평생 반복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마다 여름은 창턱을 떠나 날아갈 준비를 한다// 이 계단은 집을 벗어난다// 여름에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여름이 이리저리 피어 있는 풍경이다/ 낮은 풀들이 한쪽으로 밟혀 누워 있다//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다// 이 누적 없는 반복을 삶과 구분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이 시의 서정적 일면이다// 구관조 씻기기 / 황..

유언 –아들, 딸에게 / 류근 절대로 남에게 베푸는 사람 되지 말아라./ 희생하는 사람 되지 말아라./ 깨끗한 사람 되지 말아라./ 마음이 따뜻해서 남보다 추워도 된다는 생각하지 말아라./ 앞서 나가서 매맞지 말아라./ 높은 데 우뚝 서서 조롱 당하지 말아라./ 남이 욕하면 같이 욕하고/ 남이 때리면 같이 때려라./ 더 욕하고 더 때려라./ 남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웃어주지 말아라./ 실패하면 슬퍼하고 패배하면 분노해라./ 빼앗기지 말아라./ 빼앗기면 천배 백배로 복수하고 더 빼앗아라./ 비겁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비겁해라./ 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하느님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큰 교회 다녀라./ 세상에 나쁜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부끄러운 짓이 있다고 믿지 말아라./..

지평선 /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자서(自序) / 김혜순 시는 말씀이 아니다. 말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장르는 운명이다./ 나는 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편안히 안주한 시들은 싫..

풍경 / 심보선 1// 비가 갠 거리, XX 공업사의 간판 귀퉁이로 빗방울들이 모였다가 떨어져 고이고 있다. 오후의 정적은 작업복 주머니 모양 깊고 허름하다. 이윽고 고인 물은 세상의 끝자락들을 용케 잡아당겨서 담가 놓는다. 그러다가 지나는 양복신사의 가죽구두 위로 옮겨간다. 머쉰유만 남기고 재빠르게 빌붙는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엉긴 기름을 보고 무지개라며 손가락으로 휘젓는다. 일주일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지독한 무지개다...... 것도 일종의 특허인지 모른다.// 2// 길 건너 약국에서 습진과 무좀이 통성명을 한다. 그들은 다 쓴 연고를 쥐어짜내듯이 겨우 팔을 뻗어 악수를 만든다. 전 얼마 전 요 앞으로 이사왔습죠. 예, 전 이 동네 20년 토박이입죠. 약국 밖으로 둘은 동시에 털처럼 삐져나온다.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