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론 / 허수경 고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기댈 전통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전통이라는 것에 기대면 스스로를 베끼는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위기감 때문이다. 여태껏 누군가가 써오던 시를 쓰면서 시인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고아인 시인들을 사랑한다. 모어로 아무도 밟지 않은 영토에서 비틀거리는 시인들을 존경한다./ 균열을 감지할 때 온전히 경험을 해야 한다. 이것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몸을 정확하게 통과(하는 시...)/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도 부도덕한 이들은 많다. 다만 부와 권력의 문화라는 것이 나를 미학적으로 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인간의 결핍에 관심이 있다. 결핍이 빚어내는 내면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 ..
어떤 귀로 / 박재삼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 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 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놓는다.// 잠자는 아내 / 박재삼 깨어 있을 때는/ 그리 일이 많던 아내가/ 잠에 곯아떨어지고 보면/ 세상천지는 나 몰라라/ 숨 쉬는 소리만이/ 새록새록 들리는 데,// 이렇게 늘 가까이서/ 살을 대고 산 것이/ 벌써 30년이 되었구나// 이 인연을 어찌하고/ 각각 이승을 뜨고/ 억울하게 땅 밑에 묻히는..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 한강 어린 새가 날아가는 걸 보았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거울 저편의 겨울 / 한강 1// 불꽃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파르스름한/ 심장/ 모양의 눈// 가장 뜨겁고 밝은 건/ 그걸 둘러싼/ 주황색 속불꽃// 가장 흔들리는 건/ 다시 그걸 둘러싼/ 반투명한 겉불꽃// 내일 아침은 내가/ 가장 먼 도시로 가는 아침/ 오늘 아침은/ 불꽃의 파르스름한 눈이/ 내 눈 저편을 들여다본다// 2// 지금 나의 도시는 봄의 아침인데요 지구의 핵을 통과하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꿰뚫으면 그 도시가 나오는데요 그곳의 시차는꼭 열두 시간 뒤, 계절은 꼭 반년 뒤 그러..
이렇게 나는 오늘도 / 김동리 오늘 아침엔 월급봉투로 연탄을 들이고/ 어저께는 문인협회의 위원에 뽑혔습니다/ 내일엔 다방에 나가 악수를 널어놓고/ 저녁때엔 어느 편집장과 술을 마실 예정입니다/ 지난해엔 둘째아이의 임파선 수술을 보았고/ 이달엔 '섰다'에 미쳐 밤을 새고 다닙니다/ 시는 어려서부터 일찍이 손을 대인 것/ 소설은 약관에 이미 당선이 되었지만/ 아직 어느 나무 그늘 아래도 내 마음 쉴/ 의자 하나 놓여 있지 않습니다/ 봅소서, 나를 지키는 그대의 맑은 눈동자/ 앉으나 서나 가나 머무나 언제 어디서고/ 나에게서 떠남없는 그대의 영원한 눈길이여/ 이제 나는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채/ 서울역이나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잡으려고/ 동대문 모퉁이를 헐덕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봅소서, 이렇게 나는 오..
노시인이 시를 쓰네 / 울라브 하우게 노시인이 시를 쓰네 행복하도다 행복하도다 샴페인 병처럼 그의 내부에서 봄(春)이 기포들을 밀어 올리니 병마개가 곧 솟아오르리. 어린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 울라브 하우게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 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이 없다ㅡ/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
승무(僧舞)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낙화 / 조지훈 ..
청춘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세월은 피부의 주름을 늘리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진 못하지. 근심과 두려움, 자신감을 잃는 것이 우리 기백을 죽이고 마음을 시들게 하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예순이건 열여섯이건 가슴 속에는 경이로움을 향한 동경과 아이처럼 왕성한 탐구심과 인생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
풀꽃 / 나태주 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2 이름을 알고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 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꽃들아 안녕 / 나태주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촉 / 나태주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길// 두껍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촉을 본다// 얼랄라/ 저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 한 개의 촉 끝에/ 지구를 들어올리는/ 힘이 숨어 있다./..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