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 /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짐 / 이정록 기사양반,/ 이걸 어쩐다?/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걱정마유,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
반성 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화창 / 김영승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疊疊(첩첩)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同等(동등)하고/ 자체로 沈默(침묵)이다// ―赤卒(적졸·고추잠자리의 별칭)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구나// 神(신)의 음성이다.// 아름다운 폐인 / 김영승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 둡니다/ 착하디 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 미치는 나를/ ..
어머니 / 강원석 어머니 한숨으로/ 푸른 싹 틔우고/ 어머니 눈물로/ 붉은 꽃 피웠습니다// 그 향기 짙고 짙어/ 나비도 취하는데// 어머니는 어이해/ 꽃이 지듯 가셨나요// 어머니 어머니/ 꽃이 예쁜 오늘은/ 어머니 그리워/ 마냥 우옵니다// 빗속의 추억 / 강원석 오늘은 비가 내려요 내 마음 젖어 있는데 떠나간 그대 생각에 빗속을 혼자 걸어요 빗소리 좋아했었죠 그대와 함께 있을 땐 하지만 이젠 싫어요 가슴이 아파 오니까 너무나 사랑했는데 한없이 사랑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는 왜 이렇게 끝이 났을까 그러나 울지 않아요 추억은 남아 있으니 그대는 곁에 없지만 사랑은 기억할래요 밥 / 강원 저녁 올 무렵 허기가 져/ 노을로 밥을 지어 먹었다// 시장기가 가시질 않아/ 왜 그런가 생각하니// 어머니 그..
앵두 /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흰 토끼 일곱 마리는 / 고영민 청보리밭을 보면/ 나는 왜 흰 토끼 일곱 마리가 떠오를까// 우리 밭의 보리 싹을/ 누가 뭉텅뭉텅 낫으로 베어가고// 아버지가 그 집을 찾아가/ 어린 토끼를 한 마리씩 우리에서 꺼내/ 귀때기를 잡고/ 마당 한가운데 힘껏/ 내동댕이치는데// 토끼가..
세한도(歲寒圖)-벼루 읽기 / 이근배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 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 버린 빈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광장 / 이근배 우리들의 슬픈 음반(音盤)은/ 눈이 내리는 벌판을 들려준다./ 바람과 나무,..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 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시는 구토, 오한, 발열, 흥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물게 경련과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똥 햝는 개처럼 당신을 // 싹 핥아 치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 김언희의 시집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의 자서(自序)에서 찔레 / 김언희 내 기다림의 지뢰를 밟은 내 그리움의 뇌관을 건드린 ……보라, 가청권 밖의 이 폭음 수습할 길 없는 이 참사를 슬로 비디오로 찢어지고 있는 당신 넋의 눈부신 사지를 못에게 / 김언희 박혀 있는 게/ 못의 힘인 줄 아는/ 바보/ 먹통// 못 느끼겠니……?// 못의/ 엉덩이를 두드려가며 깊이/ 깊이 못과/ 교접하는..
와불선사 / 강우식 공절밥을 얻어먹는 땜으로 아이들에게 경의 글귀를 짚어준 적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불당 밖 산도화는 그 가진 도색만으로도 능히 한 목숨 미치고야말 봄날이라. 에잇 못 참겠다. 떠억 드러누워서 경을 하늘에다 받쳐 들고 봄철 한때를 보내노라니 이 짓도 중된 마음에서 가늠하면 여간 무례하고 경칠 일 아니라 “경을 누워서 짚는 일 어딨소” 주지승 일갈에 “여자 사처야 내려다보며 뚫지만 경의 글귀는 하늘처럼 우러러야 뚫리는 법이네." 하나님 / 강우식 아내를 사랑할 때는 당신을 찾지 않습니다./ 아내를 잃으니 하늘에 닿는 슬픔에 당신을 부릅니다.// 흙 / 강우식 일생 땅 한 뙈기 가진 것 없어도/ 내 죽어 누군가의 흙이 되다니 고맙다.// 별 / 강우식 아무리 진흙탕 막살이로 살아왔어도 밤하..
때로는 물길도 운다 / 이영춘 냇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 물소리에 귀가 열리고 귀가 젖는다// 물길이 돌부리에 걸린다/ 풀뿌리에 걸린다/ 걸린 물길 빙-빙 원 그리며 포말이 된다// 물길도 순리만은 아니였구나/ 이 지상의 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밀려나고 밀어내는 등(背) 뒤편 같은 것,// 오늘 이 봄, 냇가에 앉아// 물길도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 없는 소리로 울며 간다는 것을 알았다// 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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