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누가 와서 나의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사랑이 되고 싶다.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라디오가 되고 싶다.// *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사랑’을 풍자했다. 시 / 장정일 당신 팬티를 백 번 내리고/ 거기에 천 번 입맞춘다// 내 팬티를 천 번 내리고/ 당신이 주는 만 번의 매질을 받는다// 독자는 시를 건성으로 읽는다/ 그렇지 않다면/ 방금 읽은 시에 나오는 숫자의 합을 대..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안치환의 노래 :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
얼굴 / 이바라기 노리코 절철 안에서 여우를 꼭 닮은 여자를 만났다/ 이리 보다 저리 보나 여우다/ 마을 골목길에서 뱀의 눈을 가진 소년을 만났다/ 물고기인가 싶을 정도로 하관이 넓적한 남자도 있고/ 개똥지빠귀 눈을 한 노파도 있고/ 원숭이를 닮은 사람은 쌔고 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은/ 머나먼 여행길/ 아득하고 긴긴 노정/ 그 끝에서 한순간 피어나는 것이다// 네 얼굴은 조선사람 같아 선조는 조선인이겠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본 적도 없는 조선의/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그 청명한 푸르름이 펼쳐진다/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그렇게 대답한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며/ 네 선조는 파미르 고원에서 왔어/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간 적도 없는 파미르 ..
축혼가 / 요시노 히로시 두 사람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수룩한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지 않은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완벽을 지향하지 않는 편이 좋다/ 완벽 따위는 부자연스럽다고/ 큰소리치는 편이 좋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 장난치는 편이 좋다/ 발랑 넘어지는 편이 좋다// 서로 비난할 일이 있어도/ 비난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후에 의심스러워지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조심스레 하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상대를 마음 상하게 하기 쉽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훌륭해지고 싶거나/ 올바르고 싶다고/ 마음 쓰지 말고/ 천천히 느긋이/ 햇빛을 쬐고 있는 편이 좋다// 건강하게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있는 것의 그리움에/ 문득 가슴이 ..
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 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벌초, 하지 말 걸 / 유안진 떼풀 사이사이/ 패랭이 개밥풀 도깨비바늘들/ 방아깨비 풀여치 귀뚜라미 찌르레기 소리도/ 그치지 않았는데/ 살과 뼈를 녹여 키우셨을 텐데// 다 쫓아버렸구나/ 어머니 혼자/ 적적하시겠구..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장사익의 노래 : 엄마걱정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상처1 / 마종기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상처1 / 마종기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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