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짜노 / 최영철 어, 비 오네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젖은 눈 말리지 못해 퉁퉁 부어오른 잎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 흥건히 고인 흙탕물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공 차기하던 아이들 숨고 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호박이 굴러들어온 날 / 최영철 어느 날 느닷없이 내일이 없어진다 해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해도/ 괜찮아 다 괜찮아 첫날 같은 마지막 날/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날/ 밥은 두어 숟갈만 먹어야지/ 먹고 또 먹고 뺏어먹기도 했으니/ 하늘은 두어 차례만 바라봐야지/ 자꾸 바라볼 면목이 더는 없으니/ 이제 막 당도한 저 방랑자 개하고나 놀아야지/ 일생을 바쳐 나에게 왔으니 그건 당연한 일/ 그..
'서글픈 암유2' 중에서 / 박남수 어제 밤,꿈에 한 노승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모두 뱉아 버려,속이 텅 빌 때까지 이 말씀은 내가 몇 번이고 들은 말씀 같기도 하고, 난생 처음 듣는 말씀 같기도 했다.아마 무슨 經이라는데 있는 것이겠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글픈 暗喩 / 박남수 1// 벌레의 어떤 것은/ 누에고치를 만들고 죽는다./ 다른 어떤 벌레는/ 땅속에 구멍을 파고 빈사상태로/ 한겨울을 보낸다.// 2// 어디서나 그 억센 손이 불쑥 튀어나와. 느닷없이 덮치면 몸통이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몽땅 으스러지면/ 결국 쓰레기 속에 던져져 썩는다.// 벌레들은 더듬이를 세우고/ 외계를 경계하며서,(울지도 못하고/ 성대가 퇴화하도록) 숨을 죽이고 산다.// 벌레의 어떤 것은/ 나무등걸..
구겨진 몸 / 이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 주름살 많은 부채 속, 바람 잡혀 있듯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 구석에 쿡, 쳐 박혀봐야 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그래야 바람을 안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 들이미는 사이 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 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 더 망칠 것 없다는 듯 온 몸으로 불길을 연다 그 얇은 몸으로 불을 살린다 밤의 그늘 / 이향 나무는 나무에서 걸어나오고/ 돌은 돌에서 태어난다// 뱀은 다시 허물을 껴입고/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 깊고 푸른 심연 속에서/ 흰 그늘을 뿜어올리는/ 검은/ 등불// 낮에 펼쳐둔 두꺼운 책갈피로 밤이 쌓인다// 달의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다시 ..
까치밥 / 김형오 열매 다 털리고 푸르던 살과 뼈 차근차근 내어주고 벼랑을 만날 적마다 출렁출렁 일어서던 강 뱃속 껄렁껄렁한 문자 속 다 지우고 서리 내린 이른 아침 눈 비비며 보네 가지마다 저 까만 젖꼭지 어머니 아 어머니! 어머니 / 김형오 그리 서둘러/ 돌아설 참이십니까// 삐진 발목 만져주시던/ 두 손 뒤로 접으시고/ 정녕 몰라라 하시렵니까// 핑계만 어여쁘게 펄럭이는/ 이놈은 아직 여기에 있고// 어머니 거기는/ 오늘따라 바람이 찹사온데// 거울 앞을 막 지나/ 홀로 흔들리시며 그리/ 하셔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 꽃을 다시보면 / 김형오 가지 하나에서/ 잎이 열리고 꽃불 진다는 게/ 사뭇 다른 말 같아/ 눈치 없이 물어보고 있습니다// 하루 밀치고 나서면/ 갈래 길 한쪽에 모개로 걸어/ 뒤..
아내의 맨발1 - 연엽(蓮葉)에게 줌/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으로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소금 / 류시화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
정선 / 이성복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정든 유곽(遊廓)에서 / 이성복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 이규리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 새끼들 부리에 넣어줄 때 한 번에 한 마리씩 차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노란 주둥이를 찢어질 듯 벌리고 기다릴 때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절명이 그렇게 온다면 입을 벌리고 한 생각만 집중한 채 그렇다면 한생을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나는, 벚꽃이 달아난다 / 이규리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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