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 / 오만환 절대 믿음으로 매달려 일생을 산다 힘으로 밀면 힘있게 흔들리고 솟으라면 솟고, 신바람으로 춤을 추다가 온기 남은 그 자리 흔들림 속에도 중심은 있는 것 마음 맞는 사람 찾기가 쉽기만 하다면 살아서 흔들리지 않기가 즐겁기만 하다면 회안리에서 / 오만환 책보를 메고/ 칡뿌리 씹던 길/ 설레임으로 가다가보면/ 따비밭에/ 아버지의 머리칼/ 하얗게 덮여 있다가/ 이파리 돋우는 생각들// 술래가 된 비닐하우스/ 주인은 없고/ 머리에 부딪는 문짝 하나/ 한 세월의 바람을/ 막고 있다.// 초가이거나 기와이거나/ 하늘로 받들다가/ 손목 꼬옥 잡는 친구// 어디에 연으로 떠있는 것이냐/ 얼레의 실을 감고 감으니/ 언덕도 끌려오고// 둠벙을 푸고/ 미꾸라지 움키던/ 기억 푸른 거름더미엔/ 나비도 반가운/ ..
곰국 끓이던 날 / 손세실리아 노모의 칠순잔치 부조 고맙다며 후배가 사골 세트를 사왔다 도막난 뼈에서 기름 발라내고 하루 반나절을 내리 고았으나 틉틉한 국물이 우러나지 않아 단골 정육점에 물어보니 물어보나마나 암소란다 새끼 몇 배 낳아 젖 빨리다보니 몸피는 밭아 야위고 육질은 질겨져 고기 값이 황소 절반밖에 안되고 뼈도 구멍이 숭숭 뚫려 우러날 게 없단다 그랬구나 평생 장승처럼 눕지도 않고 피붙이 지켜온 어머니 저렇듯 온전했던 한 생을 나 식빵 속처럼 파먹고 살아온 거였구나 그 불면의 충혈된 동공까지도 나 쪼아먹고 살았구나 뼛속까지 갉아먹고도 모자라 한 방울 수액까지 짜내 목축이며 살아왔구나 희멀건 국물, 엄마의 뿌연 눈물이었구나 해 설 @절절하다. 자식으로 세상에 자식 낳고 뿌리 내리기까지 어머니를 먹..
백담계곡을 내려오며 / 윤제림 1. 꼬리를 치며 따라붙는 여자 너 잘 걸렸다, 불알 밑에 힘을 돋우며 손목도 잡아보고, 쓸어안아도 가만있는 여자. 입에는 샛하얀 거품을 물고 쉴새없이 재깔이며 눈웃음도 치며 속치마도 잠깐 잠깐 내보이며 산길 이십 리를 같이 걸어내려온 여자. 2. 인간의 여자라면 마을길 이십 리쯤 더 내려왔을 텐데요. 그 여자는 한 걸음도 더는 따라오지 않습니다요, 못된 년, 망할 년 욕이나 다 나왔지만요. 내 탓이지요 뭐. 그녀의 말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으니까요. 말도 안 통하는 사내 따라 나설 계집이 어디 있겠어요. 말귀만 좀 통했으면 집에까지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외할머니 / 윤제림 - 박경리 선생의 사진을 보며 세상 모든 외할머니의 얼굴을 한 할머니 한 분이, 치악산 가을..
추천사鞦韆詞 – 춘향의 말·1 / 서정주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이 다소곳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뉘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밀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향단아. ※ ‘추천’은 그네의 한자어다. 다시 밝은 날에 ― 춘향의 말·2 / 서정주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애기구름 같았습..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너희 사이에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마라 그보다 너희 영혼들의 기슭 사이에 바다가 출렁이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하나의 잔만 마시지는 말라 서로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홀로이듯이 서로 심장을 주되 서로의 심장에 머물러 있지 말라 오직 생명의 손만이 너의 심장을 담아둘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이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라지 못하듯이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그대는 별인가 - 시인을 위하여 / 정현종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는 반짝인다"고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 위에 떠 있는/ 거대한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 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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