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2 / 김기택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저무는 빛 / 홍영철 누가 당기고 있나 해가 기울고 있다 누가 떠밀고 있나 해가 떨어지고 있다 당기지 마라 떠밀지 마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언제 기울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시계소리 / 홍영철 밤이 깊어갈수록/ 벽에 걸린 시계 소리는 크게 들린다./ 그것은/ 뚜벅뚜벅 어둠 속을 걸어오는/ 발소리 같기도 하고/ 뚝뚝 지층을 향해 떨어지는/ 물소리 같기도 하다./ 그것은/ 어둠을 한줌씩 물리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둠을 한줌씩 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눈을 뜨면/ 아무것도 걸어오지 않고 /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시계의 바늘은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벽 위에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마 저것은 시계 속의 건전지가 닳아버릴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끝없이 돌아가리라./ 의..
만물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비로서 깨닫는 그것 우리는 늘 흔들리고 있음을. 부처 / 오규원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
산정묘지1 /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
덕장 / 임보 파도를 가르던 푸른 지느러미는 뭍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장식, 대관령의 허공에 걸려 있는 명태는 거센 바람의 물결에 화석처럼 굳어 간다 내장을 통째로 빼앗기고 코가 꿰인 채 일사분란하게 매달려 있는 동태, 등뼈 깊숙이 스민 한 방울의 바닷물까지 햇볕과 달빛으로 번갈아 우려낸다 눈보라에 다 뭉개진 코와 귀는 이제 물결의 냄새와 소리를 까맣게 잃었다 행여 수국의 향수에 젖을까 봐 밤의 꿈마저 빼앗긴 지 오래다 그렇게 면풍괘선(面風掛禪)으로 득도한 노란 황태, 이놈들이 비싼 값으로 세상에 팔려나간다 요릿집의 북어찜, 제사상의 북어포, 술꾼들의 북어국… 겨울, 서울역 지하도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는 덕장 아래 떨어진 낙태(落太)들 *면풍괘선(面風掛禪) :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패러디한 것임. *낙..
가시 / 문정희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저녁연기 / 오탁번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저녁연기 같은 것 -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산문시 같은 산문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
이별의 노래 / 박목월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만술아비의 축문 / 박목월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사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인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도 응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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