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피(虎皮) 위에서 / 김관식 해 진 뒤, 몸 둘 데 있음을 신에게 감사한다!/ 나 또한 나의 집을 사랑하노니/ 자조근로사업장에서 들여온 밀가루 죽(粥)이나마 연명을 하고/ 호랑이표 시멘트 크라프트 종이로 바른 방바닥이라/ 자연 호피를 깔고/ 기호지세(騎虎之勢)로 오연(傲然)히 앉아/ 한미합동! 우정과 신뢰의 악수표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일망정/ 행(行). 주(住). 좌(坐). 와(臥)가 이에서 더 편함이 없으니/ 왕(王). 후(候). 장(將). 상(相)이 부럽지 않고/ 백악관 청와대 주어도 싫다/ G.N.P가 어떻고,/ 그런 신화 같은 얘기는 당분간 나에겐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병상록(病床錄) / 김관식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한가위 / 구상 어머니/ 마지막 하직할 때/ 당신의 연세보다도/ 이제 불초 제가 나이를 더 먹고/ 아버지 돌아가실 무렵보다도/ 머리와 수염이 더 세었답니다.// 어머니/ 신부(神父)형*이 공산당에게 납치된 뒤는/ 대녀(代女)* 요안나 집에 의탁하고 계시다/ 세상을 떠나셨다는데/ 관(棺)에나 모셨는지, 무덤이나 지었는지/ 산소도 헤아릴 길 없으매/ 더더욱 애절탑니다.// 어머니/ 오늘은 중추 한가위,/ 성묘를 간다고 백 만 시민이/ 서울을 비우고 떠났다는데/ 일본서 중공서 성묘단이 왔다는데/ 저는 아침에 연미사(煉彌撒)*만을 드리곤/ 이렇듯 서재 창가에 멍하니 앉아서/ 북으로 흘러가는 구름만 쳐다봅니다.// 어머니/ 어머니// * 신부(神父)형: 나의 친형 구대준(具大浚)은 가톨릭 신부였음. * 대녀(代女..
“시는 일찍이 내 생을 관통해 간 한 발의 탄환이었고/ 나는 그로 하여 일생을 앓으며/ 만신창이로 여기 서 있다/ 진실로 내 생을 관통한 한 발의 탄환/ 그 고통과 기쁨의 황홀한 상처.” -서시 '위난한 시대의 시인의 변(辯)' 중에서- 당신의 얼굴 / 홍윤숙 어머니/ 흰 종이에/ 수묵 풀어/ 당신의 얼굴/ 그려 보아도/ 꽃 같은 미소/ 간데 없고/ 하얗게 바랜 모습/ 줄줄이 주름진 세월/ 하늘 같은 희생들/ 그릴 바 없어/ 내 손 부끄러이/ 더듬거립니다/ 어ㆍ머ㆍ니// 미지의 땅 / 홍윤숙 그 집에선 늘/ 육모초 달이는 냄새가 났다/ 삽작문 밖 가시 울타리는/ 내 키를 넘고/ 바다는 어디만큼 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뒷산 밤나무숲은 사철을 울창하여 침울했고/ 바람이 미로에 빠진 듯 헤매다녔다// 그 시..
떠나가는 배 / 박용철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이도 못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화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두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간다// 싸늘한 이마 / 박용철 큰 어둠 가운데 홀로 밝은 불 켜고 앉아 있으면 모두 빼앗기는 듯한 외로움/ 한 포기 산꽃이라도 있으면 얼마나한 위로이랴// 모두 빼앗기는 듯 눈덮개 고이 나리면 환한 온몸은 새파란 불 붙어 있는 인광/ 까만 귀또리 하나라..
신이 감춰둔 사랑 / 김승희 심장은 하루 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 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銀環)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엄마의 발 / 김승희 딸아, ..
봄비 / 김어수 꽃잎 지는 뜨락 연두빛 하늘이 흐르다/ 세월처럼 도는 선율 한결 저녁은 고요로워/ 그 누구 치맛자락이 스칠 것만 같은 밤// 저기 아스름이 방울지는 여운마다/ 뽀얗게 먼 화폭이 메아리쳐 피는 창가/ 불현듯 뛰쳐나가서 함뿍 젖고 싶은 마음// 놀처럼 번지는 마음 그 계절이 하 그리워/ 벅찬 숨결마다 닮아가는 체념인가/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고 싶은 마음// 영산影山 / 김어수 가을산 단풍길에/ 돌을 밟고 걷다보니// 옥처럼 맑은 물이/ 굽이치며 꺾이는데// 다리 밑 긴 그림자가/ 나를 따라 흐르네.// 저 만큼 흰 구름이/ 일렁이는 잿마루에// 펄럭이는 소맷자락/ 냇물에 비치는데// 먼 허공 바라고 서서/ 갈 길 잊은 나절인가.// 다락에 올라 앉아/ 내가 나를 찾다보니// 어느덧 석양볕이..
샘물 /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청시(靑枾) / 김달진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벌레 / 김달진 고인 물 밑/ 해금 속에 꼬물거리는 빨간/ 실날 같은 벌레를 들여다보며/ 머리 위/ 등 뒤의/ 나를 바라보는 어떤 큰 눈을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그 실날 같은 빨간 벌레가 되다.// 씬냉이꽃 / 김달진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댠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
기도 / 허영자 어머니의 기도 말이 바뀌었다 평생 이웃과 가족을 위하여 올리던 기도 비로소 자신을 위하는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하느님 좋은 날 좋은 시에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말고 잠자듯 가만히 저 세상 가게 하소서. 어머니 말씀 / 허영자 고개 수그리고 걷는/ 겨울바람 속에/ 어머니 가만한 말씀 들려온다// “얘야 차 조심하거라”// 갈 곳 몰라 비틀거리는/ 외로운 저녁답/ 어둠 속에 어머니 음성 들려온다// “얘야,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다”// 옛날 그 옛날엔/ 잔소리같이 들리던 말씀/ 옛날 그 옛날엔/ 쓸데없는 걱정같이 들리던 말씀// “녜! 어머니/ 차 조심 하겠습니다/ 녜! 어머니/ 욕심없이 마음 편히 살겠습니다.”// 사모곡(思母曲) / 허영자 1 은(銀)나비// 손톱 발톱 잦아지게/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