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물길도 운다 / 이영춘 냇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 물소리에 귀가 열리고 귀가 젖는다// 물길이 돌부리에 걸린다/ 풀뿌리에 걸린다/ 걸린 물길 빙-빙 원 그리며 포말이 된다// 물길도 순리만은 아니였구나/ 이 지상의 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밀려나고 밀어내는 등(背) 뒤편 같은 것,// 오늘 이 봄, 냇가에 앉아// 물길도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 없는 소리로 울며 간다는 것을 알았다// 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동백꽃 사랑 / 배한봉 가을이 갔다고 영영 겨울이겠나 겨울 왔다고 꽃 한 송이 피지 않겠나 눈 내리는 날 여수 오동도 매서운 바닷바람에도 동백꽃 동백꽃은 숨 가쁜데 겨울이라고 꽃 한 송이 못 피운다면 그건 사랑 아니지 동백꽃 그만큼 뜨겁게 피니까 봄은 오는 거다 춥고 어둔 날에는 나도 내 마음 속의 동백꽃을 꺼내 두손 꼬옥 감싸 안는다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 봄날 나무 아래 벗어둔 신발 속에 꽃잎이 쌓였다.// 쌓인 꽃잎 속에서 꽃 먹은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 나오고, 머리에 하얀 명주수건 두른 젊은 어머니가 걸어 나오고, 허리 꼬부장한 할머니가 지팡이도 없이 걸어 나왔다.// 봄날 꽃나무에 기댄 파란 하늘이 소금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파문지고 있었다. 채울수록 가득 비는 꽃 지는 나무 아래의 허공. ..
울음 감옥 / 김원식 수번 1258, 죄명은 불효다 수원법원 가는 하늘 길에 낮달이 조등처럼 떠 있다 어머니 떠나신 지 백 일째 슬픔을 견뎌온 시간들이 빨간 신호등에 걸려 있다 고개 돌리면 배롱나무 꽃 그리움을 꾹꾹 쟁여서 백 일 동안 달군 울음 덩어리를 벌서듯 매달고 서 있다 상엿소리 홀로 가던 날 목백일홍 떨어질 때마다 꽃상여는 자주 발길을 멈췄다고 그때마다 엄마는 뒤돌아보며 갇힌 자의 울음을 들었으리라 마지막 인사도 못 드린 나는, 엄마의 칠월을 밤이면 울었다 데칼코마니-아버지 / 김원식 아버지는 칭찬도 화를 내며 하셨다/ 전교 우등상을 받던 날/ 궐련은 물며 아버지는 혀를 차셨다/ “노름판에서 논밭뙈기 쏵 날려 불고/ 저것을 어찌 갤 켜, 먼 조화여 시방.”/ 눈보라에 빈 장독 홀로 울던 새벽,/..
막걸리 / 함민복 윗물이 맑은데 아랫물이 맑지 않다니 이건 아니지 이건 절대 아니라고 거꾸로 뒤집어 보기도 하며 마구 흔들어 마시는 서민의 술 막걸리 긍정적인 밥 /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눈물은 왜 짠가 / 함민복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
쓸쓸한 그것 / 나해철 나뭇잎을 물들이다 떨어지게 하는 것 세월을 밀어 한 시대를 저물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시집도 편지도 태워서 재가 되게 하는 것 살도 뼈도 누우면 흙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로 밀려와 저만큼 조용히 있다 어머니 / 나해철 어머니/ 한 말씀 하세요/ 그 때 범람한 강물에/ 잠겨 흐느끼던 문전옥답을 바라보며/ 하시던 한 말씀 다시 들려 주세요/ 어머니/ 끊기지 않는 뿌리손으로/ 우리를 끌어안고 일어서시는 어머니/ 안식의 밤에도/ 고이 쉴 수 없는 별같은 뜬 눈장이들의/ 지새움의 산하를 기어코 일구어 푸르게 하시는/ 어머니 한 말씀 듣고 싶어요/ 그 때 모질던 어느 때에도/ 삼천리 방방곡곡 울리던 그 말씀/ 다시 토해 주세요/ 어머니/ 이 땅 이 하늘..
하상욱 - 나무위키 트위터 계정 프로필 사진 위 사진은 단편시집 '서울 시'의 '목차' 부분에 나온 사진이다. '서울 시' 단행본 중간의 사진들을 보면 이 사진을 찍으려고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고 하며, 하상 namu.wiki 좀 더 대충 살아야 꿈이 보인다 - 하상욱 『서울 시』 | YES24 채널예스 네 줄의 짧은 시로 독자들의 마음을 훔친 『서울 시』의 저자 하상욱. 작가,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아직은 어색한 그는 아주 우연히, 전자책을 내게 됐고 단행본을 펴내게 됐다. SNS 시인, 애니팡 ch.yes24.com [TEC콘서트] "두려움이 준 용기 없는 도전조차 도전" 하상욱 시인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짧은 문장으로,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글, 그런 글을 우리는 '시(詩)'라고 부른다. 짧은..
목숨 / 박이도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남의 손에 이끌리어 다니는 강아지처럼 나는 남의 이야기에 나를 빼앗기고 손오공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상만사 낌새도 못 차리고 겨울 개구리 잠자듯 좁고 답답한 어둠 속에 허깨비처럼 살았구나 그때의 시간은 현실이었나, 꿈이었나 성경은 아브라함의 가계(家系)를 선포하고 영웅 신화들은 생명의 존엄을 선포한다 결코 철학적일 수 없는 목숨이어라. 해빙기 / 박이도 봄밭엔 산불이 볼 만하다./ 봄밤을 지새우면/ 천 리 밖에 물 흐르는 소리가/ 시름 풀리듯/ 내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깊은 산악마다/ 천둥같이 풀려나는/ 해빙의 메아리/ 새벽 안개 속에 묻어오는/ 봄 소식이 밤새 천리를 간다.// 남 몰래 몸 풀고 누운 과수댁의/ 아픈 신음이듯/ 봄밤의 대지엔/ 열병하는 아지랑..
대책 없는 봄날 / 임영조 얼마 전 섬진강에서 가장 예쁜 매화년을/ 몰래 꼬드겨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였는데요/ 그 소문이 매화골 일대에/ 쫘악 퍼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도심의 공원에 산책을 나갔더니/ 아, 거기에 있던 꽃들이 나를 보더니만/ 와르르 웃어젖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요/ 거기다 본처 같은 목년(목련)이/ 잔뜩 부은 얼굴로 달려와/ 기세등등하게 널따란 꽃잎을/ 귀싸대기 때리듯 날려대지요/ 옆에 있는 산수유년은/ 말리지도 않고 재잘대기만 하는 품이/ 꼭 시어머니 편드는 시누이년 같아서/ 얄밉기만 하고요./ 개나리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꼼지락 거리며/ 호기심어린 싹눈을 내미는데요./ 아이고 수다스런 고년들의 입심이 이제/ 꽃가루로 사방 천지에 삐라처럼 날리는데요./ 이 대책 없는 봄을 어찌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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