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삶이 시들해지는 날이면 숨이 살아있는 시장으로 향한다. 느린 걸음으로 기웃거리다 보면 몸속에 엔돌핀이 샘솟고 축 처진 어깨에 힘이 실리며 덤으로 따뜻한 정까지 한 아름 안고 온다. 재래시장 난전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작은 바구니와 큰 바구니를 구분해 채소나 과일을 담아놓았다. 가격표는 골판지에 써서 바구니에 꽂아 한눈에 볼 수 있다. 모양은 삐뚜름하게 제멋에 사는 것처럼 생김새가 모두 제각각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다가앉은 자연 그대로의 물상을 보고 있으니 더없이 친근하게 여겨진다. 인간 세상의 군상들을 마주하는 것 같아 설핏 웃음이 터진다. 물건을 담은 바구니의 크기에 따라 천 원짜리 몇 장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이니 누구나 부담 없이..
지난 5월 하순부터 내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났다. 걸음걸이가 약간씩 흔들리고, 조금만 걸어도 쉽게 피곤하고, 갈증이 심하여 물통을 가지고 걸어야 했다. ‘금년에 처음 인생 80 고개 높은 문턱을 올라서는 순간의 설렘이겠지’ 하고 참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느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J 내과에서 심전도, 엑스레이 등 필요한 검사를 받은 결과 뚜렷한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순환기 내과를 거쳐, 이비인후과 이동원 교수의 집도로 턱밑의 조약돌처럼 만져지던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이 이루어졌다. 약 1년 전부터 턱밑에 작은 조약돌 같은 것이 발견되었지만 아프지도 않고 생활에 지장도 없어 그냥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줄로 알았다. 한 주가 지나 수술 시 떼어낸 부분의 조직검사..
쓸쓸한 책상 / 강영환 책상이 젖어 있다/ 꽃병이 넘어져 물이 쏟아진 것도 아닌데 흥건히 젖어 있다/ 누가 앉아 눈물을 흘리고 떠난 것일까/ 아니면 책상이 눈물을 흘린 것일까/ 책상이 오래 전부터 가진 쓸쓸한 기분이/ 한꺼번에 울컥 쏟아져 책상은 젖어 있다/ 아이들은 꽃병에 꽃을 꽂지 않고/ 책상은 더 이상 소리내어 덤벙대지 않는다/ 책상에게 슬퍼하지 말라 일러도 소용없다/ 내가 가서 앉을 수 없는 책상은 더 이상 나의 것일 수 없다/ 배가 고픈 책상은 나의 경계 밖에서 쓸쓸하게 젖어 있다// 「녹토비전」 작품은 1984년 무크지 《지평 3》에 발표하였던 것을 보완하여, 1991년 시집 『쓸쓸한 책상』에 「아리랑 삼촌」으로 개제하여 실었다. 녹토비전 01 / 강영환 호랑이 발톱 가시나무가 둘러 쳐진 울안..
강영환 시인 1951년 경남 산청 출생.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공중의 꽃」으로 등단. 1979년 《현대문학》 시 추천완료(필명:강산청),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남해」 당선. 저서는 시집으로 『붉은 색들』, 『술과 함께』 『칼잠』, 『불순한 일기 속에서 개나리가 피었다』, 『쓸쓸한 책상』, 『이웃 속으로』, 『황인종의 시내버스』, 『눈물』, 『뒷강물』, 『푸른 짝사랑에 들다』, 『집을 버리다』, 『산복도로』, 『울 밖 낮은 기침소리』 등과 『현대시』, 씨디롬 『블랙커피』, 지리산 연작시집 『불무장등』, 『벽소령』, 『그리운 치밭목』이 있다. 시조집으로 『북창을 열고』, 『남해』, 『모자아래』 등과 산문집 『술을 만나고 싶다』가 있다. 이주홍 문학상, 부산작가상. 하동문학작품상, 부산..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역사는 침묵 속에 살아 숨을 쉰다. 겹겹이 둘러싸인 산허리를 돌아서면 산수화 같은 마을이 펼쳐진다. 비슬산 자락에 물이 달을 품는 수월리(水月里)다. 깊디깊은 산골이라 실개천만 있을 뿐 작은 물웅덩이 하나 없어 도저히 달이 내려앉을 수 없는 촌락이었다. 마을 이름을 천 년을 내다보고 지었을까. 긴긴 세월 동안 조용하고 고요했던 이곳에 댐이 들어섰다. 댐이 가두어 놓은 물 위로 달이 내려앉았다. 비로소 수월리는 제 이름을 찾았다. 물과 달은 혼자 오지 않았다. 댐을 건설할 때 무려 삼천육백여 점의 유물이 땅 깊은 곳에서 기지개를 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유물은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 시대의 것도 아니요. 선사 시대의 것도 아니었다. 이서국(伊西國)이 남긴..
번역문 우리 백부와 곡운계곡으로 말하면 전후 십수 년 동안 일상의 기거에서 앉든 거닐든 구곡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첩첩 산곡과 울창한 초목이 모두 당신의 폐부며 모발이요, 안개와 구름이 모두 당신의 들숨이며 날숨이요, 물고기와 새와 고라니와 사슴이 모두 당신의 벗이니 무엇을 찾은들 얻지 못하겠는가. 그럼에도 종소문과 같은 화가를 빌어 그림을 그린 것은 어째서인가? 실로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발문을 쓴 뒤 선생이 읽어 보시고는, “네 말이 좋구나. 그러나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말이야. 내 이 두 다리가 때때로 산을 나가지 않을 수 없으니 이 구곡을 늘 눈길 속에 담아두지 못하잖아. 그럴 때에 이걸 보려는 게지.” 하셨다. 아, 선생의 말씀대로라면 좋아함이 독실하고 즐거움이 깊다고 하지 않으면 참..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동상 진분홍 꽃 무리가 금방이라도 산언덕을 태울 듯 붉어지면 축제는 시작되었다.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들어오고 뽕할머니 제사 준비도 부산해졌다. 진달래꽃은 돌가자미라는 춤으로 쑥을 만나러 오고, 4월의 바다는 물을 벗기 시작했다. 서망마을 바당곳, 무당이 물에 빠진 넋을 건져 올리고 있다.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어대다 파도에 쓸려 멀어지고 무가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며 바닷속에 누운 넋을 달랜다. ‘어 이를 갈거나 어 이를 갈거나/ 이제 가면 못 오는 길 어서 바삐 가지 말고/ 불쌍하신 망자님 세 왕가고 극락 갈 제/ 천궁 없이 어이가리/ 잘 가시오’. 당골은 건져온 넋의 극락 천도를 기원한다. 낮은 대금 소리는 날카로운 피리 소리에 묻히고 가냘픈 해금 소리는..
2021년 제8회 경북일보 청송객주문학대전 은상 달팽이가 더듬이를 내밀었다. 사방이 풀밭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제 등을 옮기자니 한나절이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길은 위험천만이다. 빠르게 이동하는 개미떼가 아무리 부러워도 눈길 한번 줄 수 없다. 잠시도 해찰부릴 수 없는 달팽이는 아무도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을 기도하기위해 구도자의 길을 나선 어느 수도자와 비슷하다. 나선형의 등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는 르네상스시대의 건축양식을 능가한 전위예술가요, 타고난 재주 또한 기묘하다. 아름드리나무에 빨판처럼 달라붙어있는 밀착성에 더하여, 곡예사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한 면모(面貌)를 보여준다. 이러한 달팽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다소 짭조름하다. 달팽이도 한때 바다가 고향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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