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절기 값을 한다. 소한, 대한 추위에 동네를 흐르는 매호천이 꽁꽁 얼어붙었다. 조그만 빙판이 생겨 동네 아이들이 나와서 얼음지치기한다. 젊은 엄마들도 아이들 겨울 체험이라도 시켜주겠다는 듯 모여들어 와글거린다. 나도 가던 길 뒤로하고 슬쩍 얼음판으로 끼어들어 애들처럼 미끄럼을 타본다. 그 옛날 스케이팅을 즐기던 생각이 난다. 어느 겨울날 친구가 형 것이라면서 낡은 스케이트를 들고 나와 타러 가자고 했다. 바로 몇 명이 어울려 버스를 타고 시 외곽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로 갔다. 그곳에는 스케이트를 탈 만한 논이 있어 초보자인 우리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스케이트를 가지고 온 친구도 스케이트 타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누가 배워주고 배우는 게 불가능했다. 거기서 누가 장난스런 아이디어를..
김상미 시인, 1957년 부산직할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가 있다. 2003년 박인환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인 축구 {글발} 회원 미스터리 / 김상미 모든 꽃은/ 피어날 땐 신을 닮고/ 지려할 땐 인간을 닮는다.// 그 때문에/ 꽃이 필 땐 황홀하고/ 꽃이 질 땐 눈물이 난다// 공생 / 김상미 시는 시인의 가슴을 파먹고/ 시인은 시의 심장을 파먹고/ 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파먹고/ 가난한 자는 부자들의 동정을 파먹고/ 삶은 날마다 뜨고 지는 태양의 숨결을 파먹고/ 태양은 쉼 없이 매일매일..
경주 남산에 수많은 골짜기가 있다. 어느 곳으로 오르든 신라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골짜기는 용장골로 길이가 3km에 달한다. 신라시대 용장사茸長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용장골’로 불리며, 아직도 탑이 남아있어 ‘탑상골’로 불리기도 한다. 남산은 해발 5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발길 닿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다. 이 골짜기만 해도 용장사 외에 20여 개의 절터가 있다. 불교가 왕성했을 시절엔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끊일 날 없었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서라벌을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 塔塔雁行’이라고 묘사했다. '절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졌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고 했을 만큼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이었다. 용장골을 오르는 동안 물소..
마당을 쓸었다. 태풍이 지나간 마당은 담장 없는 이웃집에서 굴러온 나뭇잎과 꽁초 들이 널브러져 있다. 외출을 하려다가 아무런 준비 없이 쓰레기를 주섬주섬 주워 들고 쓰레기장으로 갔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골목길 전봇대에 매달린 카메라와 눈이 딱 마주쳤다. 카메라 안에 있는 그 렌즈와 눈이 마주치는데 이유 없이 움찔거렸다. 나쁜 짓 하다 들킨 기분이랄까. 그것은 주운 쓰레기를 봉투 담지 않고 손에 들고 있었을 뿐인데. 카메라의 눈을 피해서 들고 간 쓰레기를 덜 채워진 봉투를 열어 꾸겨 넣었다. 감시카메라가 마을 골목까지 들어 온지 몇 해가 되었다. 이 카메라도 쓰레기장 앞에 서 있은 지는 두 해는 지났지 싶은데, 그동안 무심했다는 것은 당당함이다. 그런데 움찔하고는 가던 길을 멈추고 카메..
자신감에 넘치던 젊은 시절, 대한민국 육군 병장, 이(李) 병장으로 제대신고를 할 땐 자신감과 열정으로 의욕이 넘쳤다. 당시 제대 장병들끼리는 병장은 오성장군 중 하나라고 농담조로 말했다.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과 발전을 의미하는 뜻이리라. 그러나, 군대에서 제대 후 산촌의 시냇가 작은 오두막 골방에서 책과 씨름하며 혼자 지낸 시간이 꽤나 흘렀다. 청운의 꿈을 안고 큰 뜻을 품었지만 시험에서 몇 번의 고배를 맛보며 좌절했다. 의욕과 자신감에 넘치던 혈기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가슴은 초겨울 찬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을씨년스럽고 막막해져 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어느 날 오랜만에 그녀가 오두막에 찾아왔다. 둘은 시골의 작은 호숫가를 걸었다. 꽁꽁 언 호수 위에 간밤에 눈이 내려 하얀 눈밭이다. 그녀의 한..
이연주(1953년~1992년) 시인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1985년 시 동인 '풀밭' 활동 시작하여 1989년 「죽음을 소재로 한 두 가지의 개성1」외 1편으로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하였다. 등단은 그의 나이 마흔이 다 된 1991년 《작가세계》 가을호에 「가족사진」 외 아홉 편의 시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식 등단했다. 바로 그 해 10월 10일 첫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세계사)을 출간했다. 작고 후에 『속죄양, 유다』(세계사, 1993), 『이연주 시선집』이 출판되었다. 이연주 시인 이연주 시인 이연주(1953~1992) / 김상미 2년 남짓, 시처럼 살다 가다 익명의 사랑 -위험한 시절의 진료실 ... blog.naver.com [이연주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겨울 석양 / ..
우리는 엄마를 가끔 이여사라고 부른다. 누구 아내, 누구엄마, 아줌마로 평생 불렸던 엄마가 어느 날 환한 얼굴로 외출에서 돌아왔다. 친구를 따라 서실에 갔는데 이여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무심한 딸들은 엄마를 기쁘게 했던 이여사라는 호칭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엄마는 다시 누구 아내, 누구 엄마,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날 엄마가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면서 우울증이 같이 왔다. 우리는 엄마를 예전처럼 환하게 웃게 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여사’라는 호칭을 기억해 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별칭처럼 불러봤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여사는 오빠 넷을 둔 막내딸로 태어났다. 외조부모님은 나이가 많아서 낳은 고명딸을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키운 탓에..
번 역 문 예산현(禮山縣)의 출신(出身) 현진국(玄鎭國)은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잘 도와주었습니다. 작년 8월에 큰비가 내렸을 때 입암면(立巖面)의 들판이 온통 물에 잠겨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 장차 물에 빠져 모두 죽을 염려가 있었는데 현진국이 사람들을 모으고 배를 빌려서 1000여 명을 구해내었습니다. 그러고는 물이 빠지기 전까지 5, 6일 동안 음식을 마련하여 먹이고, 물이 빠진 뒤에는 빚을 얻어 곡식을 구해다가 집집마다 나누어 주어 각기 편안히 살게 해 주었습니다. 전후로 들어간 비용이 거의 수천 금이 넘었습니다. 또 춘궁기에는 밥과 죽을 공급하고 돈과 쌀을 계속 나눠주어 원근에서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소 이름난 부자가 아닌데도 이렇게 의로운 마음에서 사람의 목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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