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감춰둔 사랑 / 김승희 심장은 하루 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 번 갔다 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銀環)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엄마의 발 / 김승희 딸아, ..
봄비 / 김어수 꽃잎 지는 뜨락 연두빛 하늘이 흐르다/ 세월처럼 도는 선율 한결 저녁은 고요로워/ 그 누구 치맛자락이 스칠 것만 같은 밤// 저기 아스름이 방울지는 여운마다/ 뽀얗게 먼 화폭이 메아리쳐 피는 창가/ 불현듯 뛰쳐나가서 함뿍 젖고 싶은 마음// 놀처럼 번지는 마음 그 계절이 하 그리워/ 벅찬 숨결마다 닮아가는 체념인가/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고 싶은 마음// 영산影山 / 김어수 가을산 단풍길에/ 돌을 밟고 걷다보니// 옥처럼 맑은 물이/ 굽이치며 꺾이는데// 다리 밑 긴 그림자가/ 나를 따라 흐르네.// 저 만큼 흰 구름이/ 일렁이는 잿마루에// 펄럭이는 소맷자락/ 냇물에 비치는데// 먼 허공 바라고 서서/ 갈 길 잊은 나절인가.// 다락에 올라 앉아/ 내가 나를 찾다보니// 어느덧 석양볕이..
샘물 /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청시(靑枾) / 김달진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을/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우고/ 살찐 암록색(暗綠色)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벌레 / 김달진 고인 물 밑/ 해금 속에 꼬물거리는 빨간/ 실날 같은 벌레를 들여다보며/ 머리 위/ 등 뒤의/ 나를 바라보는 어떤 큰 눈을 생각하다가/ 나는 그만/ 그 실날 같은 빨간 벌레가 되다.// 씬냉이꽃 / 김달진 사람들 모두/ 산으로 바다로/ 신록철 놀이 간다 야댠들인데/ 나는 혼자 뜰 앞을 거닐다가/ 그늘 밑의 조그만 ..
기도 / 허영자 어머니의 기도 말이 바뀌었다 평생 이웃과 가족을 위하여 올리던 기도 비로소 자신을 위하는 간절한 기도가 되었다. "하느님 좋은 날 좋은 시에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말고 잠자듯 가만히 저 세상 가게 하소서. 어머니 말씀 / 허영자 고개 수그리고 걷는/ 겨울바람 속에/ 어머니 가만한 말씀 들려온다// “얘야 차 조심하거라”// 갈 곳 몰라 비틀거리는/ 외로운 저녁답/ 어둠 속에 어머니 음성 들려온다// “얘야, 마음 편한 것이/ 제일이다”// 옛날 그 옛날엔/ 잔소리같이 들리던 말씀/ 옛날 그 옛날엔/ 쓸데없는 걱정같이 들리던 말씀// “녜! 어머니/ 차 조심 하겠습니다/ 녜! 어머니/ 욕심없이 마음 편히 살겠습니다.”// 사모곡(思母曲) / 허영자 1 은(銀)나비// 손톱 발톱 잦아지게/ ..
산 9 / 김광림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 두 암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산 4 / 김광림 아침이면/ 눈을 부라리고 꽈리를 부는/ 짐승이 있다.// 터진 황금(黃金)의 풍선(風船)에서 흩어져 나온/ 은혜(恩惠)로운/ 한낮이다// 지루한 속앓이를 외색(外色) 못하는 진종일/ 부신 가루를 회수(回收)해다 환약(丸藥)을 빚고 나면/ 저녁이다// 장엄(壯嚴)하게 투약(投藥)을 받아 마시고는/ 잠이 드는/ 짐승이 있다.// 선과 연 / 김광림 젊었을 땐/ 좋은 일을 서둘러라/ -고/ 늘 들어 왔지만// 고희(古稀)의/ 이 나이엔/ 사랑은 서둘..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 고정희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풀잎으로 오고/ 피아골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 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