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장정일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누가 와서 나의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사랑이 되고 싶다.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라디오가 되고 싶다.// *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사랑’을 풍자했다. 시 / 장정일 당신 팬티를 백 번 내리고/ 거기에 천 번 입맞춘다// 내 팬티를 천 번 내리고/ 당신이 주는 만 번의 매질을 받는다// 독자는 시를 건성으로 읽는다/ 그렇지 않다면/ 방금 읽은 시에 나오는 숫자의 합을 대..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안치환의 노래 : 모란이 피기까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
얼굴 / 이바라기 노리코 절철 안에서 여우를 꼭 닮은 여자를 만났다/ 이리 보다 저리 보나 여우다/ 마을 골목길에서 뱀의 눈을 가진 소년을 만났다/ 물고기인가 싶을 정도로 하관이 넓적한 남자도 있고/ 개똥지빠귀 눈을 한 노파도 있고/ 원숭이를 닮은 사람은 쌔고 쌨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은/ 머나먼 여행길/ 아득하고 긴긴 노정/ 그 끝에서 한순간 피어나는 것이다// 네 얼굴은 조선사람 같아 선조는 조선인이겠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본 적도 없는 조선의/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그 청명한 푸르름이 펼쳐진다/ 아마도 그렇겠죠 나는 그렇게 대답한다// 물끄러미 날 바라보며/ 네 선조는 파미르 고원에서 왔어/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눈을 감으면/ 간 적도 없는 파미르 ..
축혼가 / 요시노 히로시 두 사람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어수룩한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지 않은 편이 좋다/ 너무 훌륭하면/ 오래가지 못한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완벽을 지향하지 않는 편이 좋다/ 완벽 따위는 부자연스럽다고/ 큰소리치는 편이 좋다//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 장난치는 편이 좋다/ 발랑 넘어지는 편이 좋다// 서로 비난할 일이 있어도/ 비난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후에 의심스러워지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조심스레 하는 편이 좋다/ 바른말을 할 때/ 상대를 마음 상하게 하기 쉽다고/ 깨닫는 편이 좋다// 훌륭해지고 싶거나/ 올바르고 싶다고/ 마음 쓰지 말고/ 천천히 느긋이/ 햇빛을 쬐고 있는 편이 좋다// 건강하게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 있는 것의 그리움에/ 문득 가슴이 ..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이현주 시인 바다 그리워 깊은 바다 그리워 남한강은 남(南)에서 흐르고 북한강은 북(北)에서 흐르다가 흐르다가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아아, 두물머리 너른 들에서 한강 되어 흐르는데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설레이는 두물머리 깊은 들에서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바다 그리워 푸른 바다 그리워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 밥 먹는 자식에게 / 이현주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으로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버리면/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주님을 모시듯 ..
섬 / 신배승 순대속같은 세상살이를 핑계로 퇴근길이면 술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늘 하나라고 건배를 하면서도 등 기댈 벽조차 없다는 생각으로 나는 술잔에 떠 있는 한 개 섬이다 술취해 돌아오는 내 그림자 그대 또한 한 개 섬이다 기침 / 신배승 돌아누워도 돌아누워도 찾아오는/ 환장할 기침은 언제나 끝이 나려는지/ 밥그릇의 천길 낭떠러지 속으로/ 비굴한 내 한몸 던져버린 오늘/ 삶은 언제나 가시박힌 손톱의 아픔이라고/ 아무리 다짐을 놓고 놓아봐도/ 별자리마저 제집을 찾아가는 새벽녘까지/ 나의 마른 기침은 멈출 줄을 모른다// * 장사익의 노래: 기침 나 무엇이 될까하니 / 신배승 나 무엇이 될까하니/ 그리운 그대 꿈속까지 찾아가/ 사랑하는 그대 귀 씻어주는/ 빛 고은 솔바람 소리// 나 무엇이 될까하니/ 그리..
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 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벌초, 하지 말 걸 / 유안진 떼풀 사이사이/ 패랭이 개밥풀 도깨비바늘들/ 방아깨비 풀여치 귀뚜라미 찌르레기 소리도/ 그치지 않았는데/ 살과 뼈를 녹여 키우셨을 텐데// 다 쫓아버렸구나/ 어머니 혼자/ 적적하시겠구..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한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장사익의 노래 : 엄마걱정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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