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1 / 마종기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상처1 / 마종기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사고무친한 늙은 나를/ 초라하게 쳐다보는 젊은이여/ 세상의 모든 일은 언제나/ 내 가슴에는 뻐근하게 왔다./ 감동의 맥박은 쉽게 널뛰고/ 어디에서도 오래 쉴 자리를/ 편히 구할 수가 없었다..
뒷짐 /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짐 / 이정록 기사양반,/ 이걸 어쩐다?/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걱정마유,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
따뜻한 봄날 / 김형영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 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 감아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나 / 김형영 수술 전날 밤 꿈에/ 나는 내 무덤에 가서/ 거기 나붙은 내 명패와 사진을 보고/ 한생을 한꺼번에 울고 또/ 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흘린 ..
반성 16 /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화창 / 김영승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疊疊(첩첩)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同等(동등)하고/ 자체로 沈默(침묵)이다// ―赤卒(적졸·고추잠자리의 별칭)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구나// 神(신)의 음성이다.// 아름다운 폐인 / 김영승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 둡니다/ 착하디 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 미치는 나를/ ..
어머니 / 강원석 어머니 한숨으로/ 푸른 싹 틔우고/ 어머니 눈물로/ 붉은 꽃 피웠습니다// 그 향기 짙고 짙어/ 나비도 취하는데// 어머니는 어이해/ 꽃이 지듯 가셨나요// 어머니 어머니/ 꽃이 예쁜 오늘은/ 어머니 그리워/ 마냥 우옵니다// 빗속의 추억 / 강원석 오늘은 비가 내려요 내 마음 젖어 있는데 떠나간 그대 생각에 빗속을 혼자 걸어요 빗소리 좋아했었죠 그대와 함께 있을 땐 하지만 이젠 싫어요 가슴이 아파 오니까 너무나 사랑했는데 한없이 사랑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는 왜 이렇게 끝이 났을까 그러나 울지 않아요 추억은 남아 있으니 그대는 곁에 없지만 사랑은 기억할래요 밥 / 강원 저녁 올 무렵 허기가 져/ 노을로 밥을 지어 먹었다// 시장기가 가시질 않아/ 왜 그런가 생각하니// 어머니 그..
독도에 갈 때엔 독도에 갈 때는/ 반드시 친구와 같이 가지 않아도 될 일이다/ 거기엔 수많은 괭이갈매기들이 친구 되어 줄 테니까// 독도에 갈 때는/ 더위 걱정으로 손부채를 갖고 가지 않아도 될 일이다/ 거기엔 사시사철 시원한 천연바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독도에 갈 때는/ 사치스런 외로움 같은 것 챙기지 않아도 될 일이다/ 거기엔 몸이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외로우니까// 독도에 갈 때엔/ 국토사랑 같은 것 미리 염두에 두고 가지 않아도 될 일이다/ 거기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대는 애국자가 될 터이니까// 독도는 현실이다 / 오정방 아홉을 잃더라도 하나를 잃지 않으면/ 다 잃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고/ 반면에 아홉을 얻고도 하나를 잃으면/ 열을 모두 다 잃는 것과 같은 경우도 있다/ ..
문 열어라 / 허영만 산 설고 물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문 열어라// 잠결에 후다닥 뛰쳐나가/ 잠긴 문 열어제치니/ 찬바람 온몸을 때려/ 꼬박 뜬눈으로 날을 샌 후// 문 열어라// 아버님 목소리 들릴 때마다/ 세상을 향한/ 눈의 문을 열게 되었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고// 그러나 나도 모르게/ 그 문 다시 닫혀졌는지/ 어젯밤에도/ 문 열어라.// 밤비 / 허형만 비가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여는 버릇이 있다// 방문을 열면/ 눈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육순의 어머니// 공양미 삼백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다시며/ 외가댁에..
별 /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水月觀音圖 / 정진규 고려 佛畫 水月觀音圖를 보러 갔다 다른 건 보이지 않고 그분의 맨발 하나만 보였다 도톰한 맨발이셨다 그런 맨발을 나는 처음 보았다 연꽃 한 송이 위에 놓이신 그분의 맨발, 요즈음 말로 섹시했다 열려 있었다 들어가 살고 싶었다 버릇없이 나는 만지작거렸다 1310년, 687년 전에도 섹시가 있었다 419.5×245.2! 장대하셨으나 장대하시지 않음이 거기 있었다 당신을 뵈오려고 전생부터 제가 여기까지 맨발로 걸어왔어요 제 맨발은 많이 상해 있어요 말하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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