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경(全榮慶, 1930.8.22 ~ 2001.5.5.) 시인 1930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5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선사시대〉가, 1956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正義와 微笑〉가 당선되어 등단. 1956년부터 수도여자사범대학 국문과 교수로 교단에 섰다가 1962년 동아일보 문화부장으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사사편찬부장, 출판부장, 조사부장을 역임했으며 1967년 퇴사했다. 동아일보 재직 중 평전 을 펴냈다. 그후 1981년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되어 1995년 정년 퇴임하였다. 시집으로는 「선사시대」, 「김산월 여사」, 「나의 취미는 고독이다」, 「어두운 다릿목에서」를 발간하였다. 편저로는 한국 근대 작고 시인 선집 「영원한 서장」이 있다. 2001년 지병으로..
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푸리가 눕는다 기도(祈禱) / 김수영 부제: 사․일구(四․一九)순국학도(殉國學徒)위령제(慰靈祭)에 붙이는 노래 시(詩)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戀人)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革命)의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물이 흘러가는 달이 솟아나는/ 평범한 대자연(大自然)의 법칙(法則)..
앵두 /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흰 토끼 일곱 마리는 / 고영민 청보리밭을 보면/ 나는 왜 흰 토끼 일곱 마리가 떠오를까// 우리 밭의 보리 싹을/ 누가 뭉텅뭉텅 낫으로 베어가고// 아버지가 그 집을 찾아가/ 어린 토끼를 한 마리씩 우리에서 꺼내/ 귀때기를 잡고/ 마당 한가운데 힘껏/ 내동댕이치는데// 토끼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날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세한도(歲寒圖)-벼루 읽기 / 이근배 1 바람이 세다 산방산(山房山) 너머로 바다가 몸을 틀며 기어오르고 있다 볕살이 잦아지는 들녘에 유채 물감으로 번지는 해묵은 슬픔 어둠보다 깊은 고요를 깔고 노인은 북천을 향해 눈을 감는다 가시울타리의 세월이 저만치서 쓰러진다 바다가 불을 켠다 2 노인이 눈을 뜬다 낙뢰(落雷)처럼 타 버린 빈 몸 한 자루의 붓이 되어 송백의 푸른 뜻을 세운다 이 갈필(渴筆)의 울음을 큰선비의 높은 꾸짖음을 산인들 어찌 가릴 수 있으랴 신의 손길이 와 닿은 듯 나무들이 일어서고 대정(大靜) 앞바다의 물살로도 다 받아낼 수 없는 귀를 밝히는 소리가 빛으로 끓어넘친다 노인의 눈빛이 새잎으로 돋는다 광장 / 이근배 우리들의 슬픈 음반(音盤)은/ 눈이 내리는 벌판을 들려준다./ 바람과 나무,..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 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시는 구토, 오한, 발열, 흥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물게 경련과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는 똥 햝는 개처럼 당신을 // 싹 핥아 치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 김언희의 시집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의 자서(自序)에서 찔레 / 김언희 내 기다림의 지뢰를 밟은 내 그리움의 뇌관을 건드린 ……보라, 가청권 밖의 이 폭음 수습할 길 없는 이 참사를 슬로 비디오로 찢어지고 있는 당신 넋의 눈부신 사지를 못에게 / 김언희 박혀 있는 게/ 못의 힘인 줄 아는/ 바보/ 먹통// 못 느끼겠니……?// 못의/ 엉덩이를 두드려가며 깊이/ 깊이 못과/ 교접하는..
와불선사 / 강우식 공절밥을 얻어먹는 땜으로 아이들에게 경의 글귀를 짚어준 적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불당 밖 산도화는 그 가진 도색만으로도 능히 한 목숨 미치고야말 봄날이라. 에잇 못 참겠다. 떠억 드러누워서 경을 하늘에다 받쳐 들고 봄철 한때를 보내노라니 이 짓도 중된 마음에서 가늠하면 여간 무례하고 경칠 일 아니라 “경을 누워서 짚는 일 어딨소” 주지승 일갈에 “여자 사처야 내려다보며 뚫지만 경의 글귀는 하늘처럼 우러러야 뚫리는 법이네." 하나님 / 강우식 아내를 사랑할 때는 당신을 찾지 않습니다./ 아내를 잃으니 하늘에 닿는 슬픔에 당신을 부릅니다.// 흙 / 강우식 일생 땅 한 뙈기 가진 것 없어도/ 내 죽어 누군가의 흙이 되다니 고맙다.// 별 / 강우식 아무리 진흙탕 막살이로 살아왔어도 밤하..
때로는 물길도 운다 / 이영춘 냇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 물소리에 귀가 열리고 귀가 젖는다// 물길이 돌부리에 걸린다/ 풀뿌리에 걸린다/ 걸린 물길 빙-빙 원 그리며 포말이 된다// 물길도 순리만은 아니였구나/ 이 지상의 길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밀려나고 밀어내는 등(背) 뒤편 같은 것,// 오늘 이 봄, 냇가에 앉아// 물길도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소리 없는 소리로 울며 간다는 것을 알았다// 해, 저 붉은 얼굴 /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 십 만 원 없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 새 만석 같은 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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