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봄날 / 임영조 얼마 전 섬진강에서 가장 예쁜 매화년을/ 몰래 꼬드겨서 둘이 야반도주를 하였는데요/ 그 소문이 매화골 일대에/ 쫘악 퍼졌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도심의 공원에 산책을 나갔더니/ 아, 거기에 있던 꽃들이 나를 보더니만/ 와르르 웃어젖히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요/ 거기다 본처 같은 목년(목련)이/ 잔뜩 부은 얼굴로 달려와/ 기세등등하게 널따란 꽃잎을/ 귀싸대기 때리듯 날려대지요/ 옆에 있는 산수유년은/ 말리지도 않고 재잘대기만 하는 품이/ 꼭 시어머니 편드는 시누이년 같아서/ 얄밉기만 하고요./ 개나리도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꼼지락 거리며/ 호기심어린 싹눈을 내미는데요./ 아이고 수다스런 고년들의 입심이 이제/ 꽃가루로 사방 천지에 삐라처럼 날리는데요./ 이 대책 없는 봄을 어찌해야..
아침 / 오세영 아침은 참새들의 휘파람소리로 온다. 천상에서 내리는 햇빛이 새날의 커튼을 올리고 지상은 은총에 눈뜨는 시간 아침은 비상의 나래를 준비하는 저 신들의 금관악기 경쾌한 참새들의 휘파람 소리로 온다. 어머니 / 오세영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을 적시는//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을 켜 드는,//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나의 스물아홉 살,/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이셨다.// 설날 / 오세영 새해 첫날은/ 빈 노트의 안 표지 ..
추신 / 박주하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붉어진 앵두 같은 일 시다 달다 말도 못하고 핏방울 맺힌 혀끝으로만 굴리다가 밤길 홀로 걷다가 만난 빨간 우체통에 얼굴을 들이밀고 남몰래 중얼거렸지 사랑한다 너만 알고 있어라 벚꽃 회의 / 박주하 납골당 마당에서 긴급하게 가족회의가 열렸다 부친의 유골은 2층에 봉안되었는데 자식의 뼛가루를 3층에 올리는 것은 불효라고 주장하는 유족들, 울타리 넘어 봄날의 꽃밭으로 날아간 영혼의 행적은 묘연한데 고인의 뼛가루가 남아서 여전히 식솔들을 통섭한다. 납골당의 원칙을 내미는 관리인들과 생을 졸한 순서를 따지며 핏대를 세우는 유족들의 대치가 팽팽하다 오래된 벚나무들이 인간의 별난 절차를 경청하며 잎 먼저 틔운 삶과 꽃 먼저 피운 저들의 생애를 배심한다 생사의 위계질서가 설왕설래 ..
부부 / 황성희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 웬수" 어머니의 눈망울 속 가랑잎이 떨어져 내린다 충돌과 충돌의 포연 속에서 본능과 본능의 골짜구니 사이에서 힘겹게 꾸려온 나날의 시간들이 36.5 말의 체온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운 평생의 웬수 어머니의 봄 / 황성희 날씨가 풀렸으니 된장도 담그고 고추장도 담아/ 보내신다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낯익은 담벼락에 나풀거리는/ 메모지 한 장으로 날아왔다/ (주차하세요, 저는 8시에 돌아옵니다)/ 광고전단처럼 가볍게// 앞뒤 마음 안에 쌓인 적막을 털어 내며/ '내 한참 때는' 그 시간 속으로/..
우짜노 / 최영철 어, 비 오네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젖은 눈 말리지 못해 퉁퉁 부어오른 잎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 흥건히 고인 흙탕물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공 차기하던 아이들 숨고 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길 가겠노 호박이 굴러들어온 날 / 최영철 어느 날 느닷없이 내일이 없어진다 해도/ 오늘이 마지막이라 해도/ 괜찮아 다 괜찮아 첫날 같은 마지막 날/ 호박이 덩굴째 굴러들어온 날/ 밥은 두어 숟갈만 먹어야지/ 먹고 또 먹고 뺏어먹기도 했으니/ 하늘은 두어 차례만 바라봐야지/ 자꾸 바라볼 면목이 더는 없으니/ 이제 막 당도한 저 방랑자 개하고나 놀아야지/ 일생을 바쳐 나에게 왔으니 그건 당연한 일/ 그..
'서글픈 암유2' 중에서 / 박남수 어제 밤,꿈에 한 노승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모두 뱉아 버려,속이 텅 빌 때까지 이 말씀은 내가 몇 번이고 들은 말씀 같기도 하고, 난생 처음 듣는 말씀 같기도 했다.아마 무슨 經이라는데 있는 것이겠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서글픈 暗喩 / 박남수 1// 벌레의 어떤 것은/ 누에고치를 만들고 죽는다./ 다른 어떤 벌레는/ 땅속에 구멍을 파고 빈사상태로/ 한겨울을 보낸다.// 2// 어디서나 그 억센 손이 불쑥 튀어나와. 느닷없이 덮치면 몸통이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몽땅 으스러지면/ 결국 쓰레기 속에 던져져 썩는다.// 벌레들은 더듬이를 세우고/ 외계를 경계하며서,(울지도 못하고/ 성대가 퇴화하도록) 숨을 죽이고 산다.// 벌레의 어떤 것은/ 나무등걸..
구겨진 몸 / 이향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 주름살 많은 부채 속, 바람 잡혀 있듯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 구석에 쿡, 쳐 박혀봐야 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그래야 바람을 안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 들이미는 사이 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 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 더 망칠 것 없다는 듯 온 몸으로 불길을 연다 그 얇은 몸으로 불을 살린다 밤의 그늘 / 이향 나무는 나무에서 걸어나오고/ 돌은 돌에서 태어난다// 뱀은 다시 허물을 껴입고/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 깊고 푸른 심연 속에서/ 흰 그늘을 뿜어올리는/ 검은/ 등불// 낮에 펼쳐둔 두꺼운 책갈피로 밤이 쌓인다// 달의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다시 ..
까치밥 / 김형오 열매 다 털리고 푸르던 살과 뼈 차근차근 내어주고 벼랑을 만날 적마다 출렁출렁 일어서던 강 뱃속 껄렁껄렁한 문자 속 다 지우고 서리 내린 이른 아침 눈 비비며 보네 가지마다 저 까만 젖꼭지 어머니 아 어머니! 어머니 / 김형오 그리 서둘러/ 돌아설 참이십니까// 삐진 발목 만져주시던/ 두 손 뒤로 접으시고/ 정녕 몰라라 하시렵니까// 핑계만 어여쁘게 펄럭이는/ 이놈은 아직 여기에 있고// 어머니 거기는/ 오늘따라 바람이 찹사온데// 거울 앞을 막 지나/ 홀로 흔들리시며 그리/ 하셔도 되는 겁니까// 어머니// 꽃을 다시보면 / 김형오 가지 하나에서/ 잎이 열리고 꽃불 진다는 게/ 사뭇 다른 말 같아/ 눈치 없이 물어보고 있습니다// 하루 밀치고 나서면/ 갈래 길 한쪽에 모개로 걸어/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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